도쿄[東京] 고이시카와구[小石川區] 스와쵸[言取訪町] 54에 사무실을 두었다. 최낙종(崔洛鍾)이 이 지역에서 일하고 있었던 조선인 위생인부를 대상으로 조직했다. 결성 직후에는 재일본조선노동총동맹에 가입해 활동했다.
그 후 아나키즘계열의 단체로 성격을 바꾸어 흑풍회의 우의(友宜)단체로서 활동했다. 당시 흑풍회의 우의단체는 조선노동동흥회 외에도 조선자유노동조합, 조선인신문배달부조합, 오사키(大崎)조선인일반노동조합 등이 있었다. 조선노동동흥회는 이 가운데에서 가장 큰 세력을 가진 노동조합이었다.
이 단체는 1929년에 다카다(高田)와 센주(千住), 시바(芝)지부를 결성하는 등 조직화에 힘썼다. 지부 가운데 시바지부는 지포(芝浦) 직업소개소를 중심으로 하는 자유노동자로 조직되었는데, 지도자는 최낙종이었다.
1931년 5월에는 북(北)지부도 결성되었다. 북지부는 화장장, 매춘굴, 도살장이 즐비한 빈민굴로 유명한 삼하도(三河島) 일대에 거주하는 조선인 집단거주지를 대상으로 조직화되었다.
이 지역은 재일동화단체인 상애회의 발상지일 뿐만 아니라 대동협회, 영상협회(榮尙協會), 일선호조회(日鮮互助會) 등 대소의 반민족단체들이 진출한 지역이었다. 그리하여 이 지역에 거주하는 조선인들은 이들 반민족단체에 의해 착취를 당하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이 지역에 조선노동동흥회가 조직화에 나섰을 때 여러 반민족단체들의 방해 활동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조선노동동흥회가 이 지역에 지부를 설치함으로써 조선인노동자의 권익을 보호할 수 있게 되었다.
이 단체는 1931년 4월 7일 츄카(中華) 기독교청년회관에서 열린 제9회 대회에서 종래의 강령을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개정했다. ① 우리는 자유연합주의로서 노동계급의 해방을 기한다. ② 우리는 중앙집권조직을 배격하고 자유연합주의조직을 고창한다. ③ 우리는 일체의 정치운동을 배격한다.
이 단체는 1934년 11월 23일에 열린 북지부 제2회 정기대회에서 북지부를 조선노동자합동조합으로 개칭하고 새로운 강령을 채택했다.
명칭과 강령을 개정한 이유로 ‘급박한 조선내 사상 변천이 전적으로 조선민중해방운동전선에 미치는 그 영향에 대비해 실천적 신운동방침으로 하는 견고한 진용 정비 및 확대 강화를 할 필요성’을 들었다.
이때 개정된 강령은 1. 우리는 자유적 단결의 힘으로써 일상투쟁을 통해 노동자 농민의 해방에 매진한다. 1. 우리는 중앙집권조직을 배격하고 자유연합주의를 강조한다. 1. 우리는 연대우애협동을 사회생활의 정신으로 한다는 것 등이다. 이 단체의 주요 활동 내용은 노동쟁의 지도, 기관지 발행, 상애회와 투쟁을 들 수 있다.
이 단체는 1933년 5월에 일어난 양뢰(梁瀨) 자동차제조공장 노동쟁의가 일어났을 당시 사무실을 쟁의단본부로 제공하고 응원을 하는 등 적극적으로 지원하였다. 이외에도 1934년의 도쿄시전(東京市電), 풍륭사(豊隆社) 인쇄소쟁의 등을 지원했다.
이 단체의 기관지는 이문열(李汶烈)이 중심이 되어 1930년 7월 22일에 창간한 『흑색신문(黑色新聞)』(조선어 신문)이다. 그러나 곧 발행금지처분을 받아 이후부터는 편집인의 검거 속에서 발행되었다.
연이은 발행금지처분 속에서 1932년 9월 30일에 제9호가 발행되었으나 자금부족으로 일시 휴간했다가 10월 18일에 10호를 발행했다.
『흑색신문』은 자금 부족과 당국의 탄압 속에서도 매월마다 발간했으나 제37호를 발간하고 자금이 고갈됨에 따라 1935년 5월 6일 폐간되었다. 『흑색신문』은 조선노동동흥회가 중심이 되어 발간했으나 이곳의 기관지라기 보다는 조선인 아나키스트전체의 기관지로서 성격을 지녔다.
그러므로 이와 별도로 각 조합마다 소식지를 발간했다. 조선노동동흥회 시바지부의 『芝노동자뉴스』(1933년 2월 16일 창간)를 비롯해서 『조선동흥노동뉴스』(1935년 3월 2일 창간), 조선노동동흥회 북지부에서 개칭한 조선노동자합동조합의 『조선노동자합동조합뉴스』(1935년 7월 창간) 등이 발행되었다.
또한 재일조선인노동자의 임금을 착취하고 조선인노동자의 쟁의를 방해하며 노동자의 권익을 유린하는 상애회의 횡포와 습격에 대한 투쟁도 이 단체의 주요 활동의 하나이다.
1928년 2월 상애회와 일본 경찰이 아나키즘계열의 조직체를 분쇄하기 위해 조선노동동흥회와 조선자유노동자조합, 흑풍회를 일제히 습격하였으나 아나키스트 한하연(韓何然)이 격퇴한 사건이 일어났다.
이 과정에서 상애회원이 부상을 당하자 상애회는 1929년 6월과 1930년 1월에 각각 조선노동동흥회원들에게 린치를 가했다. 이러한 상애회원과의 투쟁에 대해 조선노동동흥회는 기관지 『흑색신문』을 통해 상애회의 행동을 비판하고 상애회 박멸을 주장했다.
파쇼체제의 강화로 인해 1930년대 중반부터 일본 지역의 사회운동은 심한 탄압 속에서 명맥을 이어나가기 힘든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1936년 3월 당국의 검거로 인해 조선인아나키즘단체인 흑우연맹이 해산된 후 조선노동동흥회도 탄압을 이기지 못하고 1937년 1월 해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