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소년총연맹 ()

근대사
단체
1928년에 조직되었던 무산소년운동(無産少年運動) 단체.
이칭
이칭
조선소년총동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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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정의
1928년에 조직되었던 무산소년운동(無産少年運動) 단체.
개설

1928년 소년운동의 통합체인 조선소년연합회가 조직체를 변경해 조선소년총동맹(朝鮮少年總同盟)이 되었다. 그러나 일제당국이 이 단체명의 사용을 금지했기 때문에 조선소년총연맹으로 바꾸었다.

연원 및 변천

이 조직체는 사회주의 계열이 소년운동의 주도권을 잡고 조직체를 변경한 것이다. 이로써 무산소년운동을 표방하여 종래 소년운동을 주도해오던 색동회와 조선소년운동협회 등 민족주의 계열은 소년운동 일선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총연맹의 임원은 위원장에 정홍교(丁洪敎), 상임서기에 최청곡(崔靑谷) · 홍찬이었으며, 그 밖에 15명의 중앙집행위원을 두었다. 그리고 1면(面) 1조직체를 채택해 군에는 군연맹, 도에는 도연맹을 조직하고, 동(洞)과 이(里)에는 반(班)을 두기로 하였다.

먼저 도연맹 조직에 착수해 경기도연맹과 경상남도연맹의 조직을 완수하였으나 전라남도 · 전라북도 · 황해도연맹 조직은 일제의 탄압으로 결성하지 못하였다. 특히, 전라남도연맹 결성을 위해 광주에 내려갔던 정홍교를 비롯한 6명의 중앙간부가 일본경찰에 잡혀 투옥되어 도단위 연맹 조직이 어렵게 되었다.

군(郡)단위 조직은 기존의 소년운동단체가 총연맹이 좌경화되는 것을 반대하여 역시 난관에 봉착하였다. 특히, 천도교 · 기독교 · 불교 등의 종교단체소속 소년운동단체들이 총연맹과의 통합을 거부하고, 민족주의 노선을 견지함으로써 총연맹의 지방조직 결성은 더욱 어렵게 되었다.

이에 총연맹은 1928년 12월 정기대회를 소집하고 부 · 군 · 면에 단일조직체 결성을 촉구하였다. 그러나 경성소년연맹(京城少年聯盟)의 대의원들이 중앙간부진을 배격하며 탈퇴를 선언하고 퇴장해 버려 실패하고 말았다.

이후 소년운동은 좌파 · 우파의 주도권 싸움으로 혼란에 빠졌으며, 끝내 1929년 ‘어린이날’ 기념행사가 총연맹측과 천도교소년연합회측의 두 갈래로 거행됨으로써 다시 양분되고 말았다.

소년운동의 이러한 내분에 우려한 재경소년단체 대표들이 다시 회담을 가지고 통일된 ‘어린이날’ 행사를 준비하기 위해 1931년 3월 전조선 ‘어린이날’ 중앙연합준비회를 발족시켰다.

그러나 총연맹측에서는 이 준비회의 결성을 반대했을 뿐만 아니라 준비회측에서 거행하는 ‘어린이날’ 행사를 배격하였다.

1937년 본격적으로 대륙침략을 개시한 일제는 우리 민족의 소년운동을 전면 금지하고, 모든 소년운동단체를 강제 해산시켰다. 이로써 한국의 소년운동은 1945년 광복까지 중단되었다.

참고문헌

「일제하(日帝下)의 한국소년운동고(韓國少年運動考)」(신재홍, 『사학연구(史學硏究)』 33, 1982)
『동아일보(東亞日報)』(1928.3.28.·10.13.)
『조선일보(朝鮮日報)』
집필자
신재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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