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비단 바탕에 채색. 세로 110.5㎝, 가로 61.8㎝.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영조는 재세(在世) 때 매 10년마다 일곱 차례나 초상화를 그려서 도합 12본의 어진을 제작하게 하였다. 그러나 현재는 51세 때와 21세 때(연잉군)의 초상화 2점만이 전해올 뿐이다.
51세 때의 초상화인 영조어진은 이모본으로서, 1900년에 조석진(趙錫晉), 채용신(蔡龍臣) 등 당대의 일급 초상화가가 그린 것이다. 이때 범본이 되었던 원본은 1744년(영조 20)에 초상화의 고수(高手)였던 장경주(張景周), 김두량(金斗樑) 등이 제작한 것이다. 원본은 영조의 생모를 받들던 육상궁(毓祥宮)에 봉안되었다가 6·25 전쟁 때 소실되고 지금은 그 이모본만이 남아 있다.
화상은 좌안7분면(左顔七分面)에 복부까지 내려오는 반신상으로, 익선관·곤룡포 차림이다. 안면에 도화색(桃花色)으로 홍기를 표현하였는데, 이것은 영조의 안색이 홍윤기(紅潤氣)가 짙었다는 『승정원일기』의 기록과 부합된다. 홍기있는 안색을 바탕으로 한껏 치켜 올라간 눈매를 따라 갈색선으로 윤곽을 그렸다. 콧등이 강조되고 콧날과 뺨, 법령(法令: 코 가장자리에서 입 양쪽 끝으로 이르는 부분)은 조각적이라 할 만큼 직선적인 선형(線形)으로 세워졌다. 그 주변에는 자연스러운 선염 효과가 나타나 있다.
옷주름 처리에서 영조어진은 당대의 양식대로 외곽선을 나타내지 않았다. 앞가슴의 보(補) 위로 올라간 각대(角帶) 역시 복제면에서 조선 후기의 시대색을 반영하고 있다.
이 영조반신상은 비록 이모본이기는 하지만, 당대 초상화의 명수들이 원본에 충실을 기하여 제작하였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한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