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안북도 의주 출신. 19세에 남편이 죽자 기독교인이 되었고, 이후 미국 선교사들의 주선으로 일본에 유학하여 요코하마여자전문학교[橫濱女子專門學校]에서 교육학을 전공하였다.
귀국 후 이화학당 교사로 재직중 돈을 모아 평양 진명여학교 경영권을 인수하고 교장에 취임하였다. 3·1만세운동에 가담하였다가, 이 일로 인해 교장직에서 물러났다. 그후 더욱 적극적으로 항일민족운동을 전개하였다.
1920년 11월 영원·덕천·맹산 지방에서 청년 다수를 모아 중국 관전현(寬甸縣)의 항일독립운동단체인 대한독립청년단연합회에 가입시켰다.
그리고 다이너마이트 도화선·권총·인쇄기와 활자 등을 사들여 맹산의 선유봉(仙遊峰) 호랑이굴에 감추어 놓고, 사형선고문을 인쇄해 일본 관헌과 친일파들에게 보내 심리적 위협을 하였다.
대한독립단 청년을 구하기 위해 불심검문하는 일본 순경을 껴안고 뒹굴어 공무집행방해죄로 6개월 징역형을 받고 평양감옥에서 복역하였으며, 만기 출옥할 즈음 맹산 선유봉의 독립운동활약 사실이 밝혀져 또다시 복역하게 되었다. 군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우체부를 습격, 3,000원을 빼앗아 임시정부에 보내기도 하였다.
1927년 민족유일당운동 일환으로 근우회(槿友會)가 조직되고 1928년 평양에 근우회 지회가 설립되자 지회장에 추대되어, 근우회의 민족주의운동과 여성해방운동을 추진하였다. 1930년에는 근우회 전국회장에 추대되었다. 안창호(安昌浩)와 의남매를 맺었으며 수양동우회(修養同友會)에도 가담하였다.
광복 후 평양에서 북조선여성동맹위원장에 임명하여 공산주의운동에 동조하도록 하였으나 “공산당은 내 동포가 아니다.”라며 1948년 월남, 대한부인회 부총재에 추대되었다. 6·25전쟁 중 피난지 부산에서 가난한 생활을 하다가 양로원에서 세상을 떠났다.
1977년 대통령표창, 1991년 애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