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읍포창(助邑浦倉)은 『경국대전』에 수록된 전국 9개 조창 중 하나로, 우수참(右水站) 소속이다. 황해도 동부 내륙 지역의 세곡(稅穀)을 수납하여 한성의 경창(京倉)으로 운송하는 기능을 담당하였다.
조읍포창은 금곡포창(金谷浦倉)과 함께 조선시대 예성강 수계 지역에 위치했던 조창이다. 고려시대에는 예성강이 수도인 개경과 가까워 예성강 수계에는 조창이 운영되지 않았다. 따라서 조읍포창과 금곡포창은 조선왕조가 개창하고 한양으로 천도한 이후에 처음 설치되었을 것이다. 『세종실록』 지리지에는 예성강 수계에서 조읍포와 금곡포 2곳이 황해도의 수조처(收租處)로 기록되어 있다. 조읍포창에서는 강음, 황주, 서흥, 봉산, 곡산, 수안, 안악, 재령, 신은, 평산, 우봉, 토산 등 황해도 12개 고을의 세곡을 거두어 한성의 경창으로 운반하는 기능을 담당하였다. 조읍포창의 수세(收稅) 구역은 대체로 조선시대 황해도 동쪽의 내륙 지역에 해당한다.
『경국대전』에 의하면, 조선 전기에는 서울과 지방의 선박을 관장하는 관청인 전함사(典艦司)에 수운판관(水運判官) 2명이 소속되었다. 2명의 수운판관은 좌도(左道) 수운판관과 우도(右道) 수운판관 각 1명씩으로, 예성강 수계에 있는 조읍포창은 배천의 금곡포창과 함께 우도 수운판관의 관할 구역인 우수참(右水站)에 소속되었다. 우도 수운판관은 종5품의 관직이었으며, 무록관(無祿官)에 해당하였다. 당시 조읍포창이 소속되어 있는 경기 우도의 조세 운반선은 모두 20척이었다. 조읍포창은 조선시대 강음 관아의 남쪽 5리 지점에 있었다. 예로부터 조읍포는 예성강 본류 상에 위치한 주요 포구 중 하나였다. 현재는 북한 황해남도 봉천군 연홍리의 소속 지역이다.
조선 전기 경기 우도 수운판관 관할 하의 조창으로는 강음의 조읍포창과 배천 금곡포창이 있었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 조읍포창은 조창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하였다. 특히 세곡의 관선(官船) 조운 대신에 민간 선박에 의한 임운(賃運)의 방식이 확대되고, 몇몇 지역에서는 세곡의 납부가 면포나 동전의 납부로 대체되면서 조읍포창은 더이상 조창의 기능을 유지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조읍포창의 조창 기능이 언제 사라졌는지는 분명히 알 수 없다. 『만기요람』과 『대전회통』 등을 살펴보면, 이미 18세기 경에는 조창의 기능을 상실한 상태임을 알 수 있다.
강음 조읍포창은 『경국대전』에 전국 9개 조창 중 하나로 수록된 조창으로, 배천 금곡포창과 함께 예성강 수계에서 조선 전기에 운영되었던 조창이었다. 조읍포창은 우수참 소속의 조창으로, 황해도 동쪽 내륙 지역의 세곡을 수납하여 한성의 경창으로 운송하는 기능을 담당하였다. 하지만 점차 조운을 통한 세곡 운송의 비중이 감소되면서 18세기에는 이미 조창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