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임천(林川). 자는 성여(成汝). 조학묵(趙學默)의 아들로, 조학영(趙學永)에게 입양되었다.
1847년(헌종 13) 유학(幼學)으로서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1853년(철종 4)에는 종묘친제 때 부응교로 참여하여 가자(加資 : 품계를 올려 줌)되었고, 1862년 이조참판에 올랐다.
1864년(고종 1) 경기도관찰사에 임명되어 세납물의 원활하고 안전한 수송에 관심을 기울였고, 장단부의 대동세·전세를 전(錢)으로 대납할 수 있도록 요청하였으며, 탐학하는 수령을 치죄하기도 하였다.
또, 경기도의 군사적 중요성을 강조하여 덕적도(德積島)와 주문도(注文島)에 설치된 자벽과(自辟窠) 가운데 1과를 특별히 감영에 속하게 하여 변장(邊將)을 자벽할 수 있게 함으로써 방위를 강화하고자 소청하여 왕으로부터 허락을 받았다.
이듬해 전라도관찰사로 전임된 뒤 풍우의 피해가 전라도 전역에 극심하자 재난을 당한 각 읍을 돌아다니며 위무하고 구휼하였다. 1867년에는 홍문관제학에 임명되어 재직중 전라도암행어사 윤자승(尹滋承)이 전 감사인 조재응의 실정을 지적하여 치죄할 것을 요구하는 서계(書啓)를 올림에 따라 중화부로 유배되었다. 그러나 곧 풀려나 홍문관제학에 임명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