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양주(楊州). 자는 미지(微之). 조의(趙誼)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영중추원사 조말생(趙末生)이고, 아버지는 관찰사 조근(趙瑾)이다. 어머니는 경주부윤 이사원(李師元)의 딸이다.
1465년(세조 11)에 진사시에 합격했고, 참봉으로 1480년(성종 11)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473년 영릉참봉(英陵參奉) 시절 수릉군곡초(守陵軍穀草)를 자신의 집으로 가져가고 또 쌀을 수릉군(守陵軍)에게 억지로 배당한 후 좋은 것과 바꾸어 자기 집으로 가져가는 죄를 범하여 고신(告身)을 박탈당하고 외방에 부처되었다. 정언이 되었을 때도 이 때의 죄로 인해 개차(改差)되었다.
1481년 화순현감으로 있으면서 남학유생(南學儒生)들의 상소로 교수(敎授)에 임용되었으나, 사표(師表)의 행실이 없다는 이유로 파직되었다. 게다가 탐욕으로 인해 화순현감에서도 견출(見黜)되었다. 1491년에 가서야 성균관전적에 임명되고, 판관으로 정5품을 뛰어넘어 첨정에 제수되었는데 남수(濫授)라는 시의(時議)가 있었다.
영릉참봉 때의 죄로 탄핵되고, 익산군수가 되었는데, 이전 수령 재직시에 피출(被黜)된데다가 장례원사의(掌隷院司議)와 형조정랑 때도 대간의 탄핵을 받아 체차(遞差)되었으므로, 수령으로 적합하지 못하다는 탄핵을 받아 개차되었다. 군자감첨정(軍資監僉正)에 제수되었으나 흔구인(痕咎人)으로 4품인 군자감첨정에 제수된 것은 남수라는 의정부의 상소로 강수(降授)되었다.
그러나 학문에 숙성(夙成)하며 백가(百家)에 뛰어났다. 뿐만 아니라 관직에서 물러났을 때도 서호(西湖)에 별장을 짓고 소영(嘯咏)하면서 지냈다. 관직은 승문원참교(承文院參校)에까지 이르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