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북도 영양 출신. 1906년 7월 사립국민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이듬해 8월 서울에서 황성국민교육회(皇城國民敎育會)에 가입하여 간사원(幹事員)으로 교육구국운동에 종사하였다.
1908년 1월 장지연(張志淵)과 함께 노령 블라디보스토크에 가서 한민학교(韓民學校) 교사로 취임하여 교포자녀들에게 민족의식과 독립사상을 교육하였으며, 『대동공보(大東共報)』의 사원이 되어 사회계몽활동을 활발히 전개하였다.
같은 해 5월 한민학교 교사를 사퇴하고 장지연과 함께 상해(上海)로 가서 대동회관(大東會館) 서기로 활동하였으며, 『대동보(大東報)』를 발간하다가 7월 귀국, 박은식(朴殷植) · 유근(柳瑾) 등을 만났다가 일본경찰에 붙잡혔으나 11월에 석방되었다. 1909년 12월 장지연의 주선으로 『경남일보(慶南日報)』의 사원이 되어 민족의식 고취에 노력하였다.
1912년 4월 대종교(大倧敎)에 입교하여, 포교사로 선임되어 북간도 일대를 순회하면서 대종교운동을 통한 독립운동에 심혈을 기울였다. 1918년 일본경찰에 붙잡혀 잔혹한 고문을 당한 뒤 정신착란증이 발생하여 병사하였다.
1983년 건국포장, 1990년 애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