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안북도 정주 출신. 1892년(고종 29) 정주에 교회를 세우고 신문화운동을 통하여 애국사상을 고취하였고, 1904년 이승훈(李昇薰)과 오산학교(五山學校)를 설립하여 교육을 통한 민족의식 고취에 힘썼다.
또 남녀청년단을 조직하고, 식산계(殖産契)를 조직하는 등 구국운동을 전개하였으며, 1911년 일제가 조작한 105인사건으로 투옥당하였다.
1919년 3·1운동 때 정주의 만세시위를 주동하였고, 3월 12일 서울에서 김백원(金百源)·문일평(文一平)·차상진(車相晋)·문성호(文成鎬) 등과 13도 대표자의 명의로 “조선독립은 2천만 동포의 요구다. 우리들은 손병희 등의 후계자로서 조선독립을 관철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애원서’를 종로 보신각에서 낭독, 일본경찰에 붙잡혀 징역 8월을 선고받았다.
1968년 대통령표창,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애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