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안남도 강서 출신. 1919년 3월 4일, 장로인 아버지 조진탁(曺振鐸) 등이 주도한 평안남도 강서군 반석면 상사리의 사천만세시위에 적극 참여하였다.
강서군 시위는 일제 헌병과의 일대격전으로 발전하고 400여명이 검거되었는데, 아버지는 원산으로, 자신은 평양으로 각각 피신하였다. 아버지는 궐석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뒷날 체포되어 사형당하였다.
1919년 10월 도피중, 김예진(金禮鎭)·최봉주(崔奉周) 등과 함께 대한청년단(大韓靑年團)을 조직, 단장에 선출되어 상해임시정부와 연락하고 『독립신문』의 배포, 군자금모금 등 독립을 위하여 활동하였다.
1921년 일본경찰에 붙잡혀 4월 5일 평양지방법원 진남포지청에서 징역 2년을 선고받았다. 출옥 후 북간도로 망명, 홍범도(洪範圖) 휘하로 들어간 강진석(康晋錫)을 찾아가서 독립운동을 전개하다가 일본경찰의 감시가 심해지자 1927년 5월 북간도 용정(龍井)으로 피신하여 활동하다가 조국광복을 맞았다.
1968년 대통령표창을 받았고,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애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