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지』 위지 동이전 부여전에 기록된, 부여인들이 외국으로 나갈 때 입는 옷감의 종류 중에는 증이 있다. 이 증에 대하여는 여러 가지 해석이 있다. 청나라의 임대춘(林大椿)은 『석증(釋繒)』에서 “『설문(說文)』에 이르기를 증은 백(帛)이며 백은 증이라고 하였다.”라고 하였다.
『한서(漢書)』 흉노전의 안사고(顔師古)의 주에서는 “백은 모두 증을 총칭하는 말이다.”라고 하였다. 백은 『삼국사기』 신라본기와 고구려본기에 기록되어 있어 우리 나라에서는 증과 더불어 일찍이 직물명으로 일컬어져 내려왔음을 알 수 있다. 백은 오늘날 견직물의 총칭으로 해석되고 있으므로 증 역시 견직물의 총칭으로 해석된다.
다만, 백은 갑골문에 일찍이 나타나고 금문에도 여러 곳에 나타나고 있어 가장 오래된 견직물의 지칭으로 보기도 하나, 한편으로는 갑골문의 백이 견직물의 지칭이 아니고 흰색 것의 지칭일 수도 있다는 견해도 있다. 『석증』에서도 백은 벽색(璧色)의 증 또는 숙련(熟練)한 증이라는 견해가 있다고 하였다.
또 증은 백을 총칭한다는 견해와 증은 두꺼운 백이라고 하는 견해가 있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증과 백은 같은 범주의 직물 지칭임이 나타난다. 그러나 부여인들이 입었다는 증은 견직물이 회(繪)·증(繒)·금(錦)으로 분리되어 기록된 것으로 미루어 견직물의 총칭이라기보다 견직물의 하나로서 해석하여야 된다고 여겨진다.
이리하여 증은 견직물의 일종인 동시에 견직물의 총칭이 되기도 하였다고 본다. 이것은 마치 포(布)가 마직물의 지칭이었으나 후에 직물의 총칭으로 쓰인 것과 같은 것이다. 백이 초기에는 염색되지 않은 백색 견직물의 지칭이었던 것이 뒤에 염색된 견직물의 지칭이 되고, 나중에는 견직물의 총칭이 되었다.
이와 같이 증 역시 처음에는 그림을 그린 회나 각색으로 조화된 금과 같이 견직물의 한 종류이었기 때문에 부여인들의 옷감에서 회·증·금으로 구별되어 기록되었다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