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6년 몽고에 쫓긴 거란족이 압록강을 건너 고려에 침입하여 황해도지방에까지 이르렀다. 이 일로 나라가 소란해지자 1217년 진위현의 영동정(令同正) 이장대(李將大), 직장동정(直長同正) 이당필(李唐必), 별장동정(別將同正) 김례(金禮) 등이 무리를 불러 모아 현령부인(縣令符印)을 빼앗고 창고를 열어 촌민에게 나누어주었다.
그리하여 굶주린 농민들을 규합하는 한편, 이웃 군에 통첩을 보내어 자칭 정국병마사(靖國兵馬使)라 하고 군대를 의병(義兵)이라 하였다. 그들은 종덕(宗德)·하양(河陽) 두 창고를 풀어 군사를 먹이면서 광주(廣州)를 침범하려 하였다.
이에 정부에서는 낭장(郎將) 권득재(權得材), 산원(散員) 김광계(金光啓) 등을 보내어 안찰사 최박(崔博)과 함께 광주·수주(水州 : 水原)의 군대로 이들을 쳤으나 진압하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다시 충청도·양주도(楊州道)의 군대를 징발하여 겨우 난을 진압시켰다.
이 난은 불평관료층인 동정직(同正職)을 지닌 산관(散官)들이 생활이 피폐한 농민들을 이용하여 일으킨 대규모의 민란이라 할 수 있다.
비록 눈앞의 탐관오리를 척결하고 재산을 약탈하는 데 그쳐, 보다 근본적인 해결을 요구하는 데까지는 이르지 못하였지만, 그들의 뭉친 힘을 과시함으로써, 무신들로 하여금 일시적이나마 조세감면과 탐관오리의 척결 등 농민들을 위한 시책을 실시하지 않으면 안 되게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