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지도 ()

인문지리
문헌
조선후기 진주성 일대를 회화식으로 그린 지도. 고지도.
정의
조선후기 진주성 일대를 회화식으로 그린 지도. 고지도.
서지적 사항

연대와 저자는 미상이다. 채색필사본으로 크기는 세로 80㎝, 가로 121㎝이다.

내용

「진주지도」는 진주성을 중심으로 성 안의 관아 건물과 그 주변의 자연 경관이 부감(俯瞰)한 시점으로 그려져 있다. 화풍은 지도보다 오히려 회화에 가까울 정도로 진주성 일대의 모습과 산의 형세가 사실적으로 묘사되었다.

화면 중심에 그려진 진주성은 내성과 외성으로 구분되는 읍성의 구조가 한 눈에 들어오는데, 내성에는 운주헌(運籌軒)을 비롯해 진남루(鎭南樓), 중영(中營), 촉석루(矗石樓), 창렬사(彰烈祠) 등 병마절도사의 군영인 병영(兵營)의 각종 건물들이 포진해 있는 모습이 상세하고 외성에 위치한 민가들은 상대적으로 소략하게 표현되었다.

관아(官衙)와 진영(鎭營), 객사(客舍), 향교(鄕校) 등 진주목(晉州牧)의 관청 건물은 성곽 밖의 북쪽 산 아래에 위치해 있다. 성 밖의 경관은 농경지가 넓게 펼쳐지고 촉석루 아래 남강에서 뱃놀이를 하는 모습 등이 평화롭고 아름다운 풍경으로 재현되었다.

남강 변에는 임진왜란 때 논개(論介)가 왜적장과 함께 강물에 몸을 던졌던 곳인 의암(義巖)이 선명히 그려져 있고, 그 옆의 바위에는 논개의 충절을 기리는 내용의 글인 '일대장강천추의열(一帶長江千秋義烈)’이라는 암각까지 그대로 표기하여 충절의 고장임을 강조하고 있다.

「진주지도」는 전반적으로 18세기에 유행한 진경산수화풍의 영향을 받아 경관을 사실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특히 대나무, 소나무, 버드나무 등 수종에 따라 수목을 달리 표현하고 연못에는 연꽃이 만개한 모습까지도 아름답게 묘사하였다. 이 지도의 제작 시기는 1823년(순조 23) 목사 홍백순(洪百淳)에 의해 건립된 의기사(義妓祠)가 촉석루 서편에 그려져 있는 것으로 보아 19세기 중반 경으로 추정된다.

현존하는 진주성 일대를 그린 회화식 지도는 「진주지도」이외에도 진주읍성의 전경을 담은 지도들이 병풍형식으로 전하고 있다. 「진주성도」(영남대박물관), 「진주도」(서울대박물관), 「진주성도병풍」(국립중앙박물관), 「진주도」(동아대박물관) 등이며 이들 지도의 제작 시기는 대체로 18세기와 19세기 작품이 대부분이다.

의의와 평가

현재 진주성을 그린 지도는 한양이나 평양의 전경(全景)을 담은 사례들과 함께 많은 양이 전하고 있다. 다만 화면 구성과 세부 표현법이 대동소이하여 정형화된 도상(圖像)이 반복적으로 모사된 것으로 생각된다. 이 「진주성도」 역시 그 범주에 속하며 19세기 진주성의 면모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시각 자료로서 가치가 있다.

참고문헌

『진주성도』(국립진주박물관, 2013)
「19세기 회화식 군현지도와 지방문화」(박은순, 『한국고지도연구』1-1, 2009)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e-kyujanggak.snu.ac.kr)
집필자
김성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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