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2년 군현지도』는 1872년 팔도 감영에서 제작한 회화식 군현 지도를 모아 국가적 차원에서 편찬한 관찬 지도집이다. 조선시대 마지막 관찬 지도집이다. 462장의 채색 필사본이며,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도서이다. 경상도 지도첩 1개를 포함하여 총 359개의 청구기호로 관리하고 있다. 제작 기간이 짧은 만큼 지리정보가 정확하지 않고, 표현이나 형식도 체계적이지 못하다. 하지만 이 시기 변화된 정치, 경제적 상황과 군사적 내용을 담고 있고, 당시의 각 지역 모습을 여과 없이 보여 주고 있어 사료로서 의미가 있다.
462장의 채색 필사본이며,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도서이다. 320장의 군현 지도와 142장의 진보 지도, 목장 지도, 산성 지도 등 군사지역을 포함한 주요 지역의 채색 필사본 회화식 지도로 구성되어 있다. 지도의 원상태는 총 358종의 접포장 형태의 지도와 하나의 첩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하나의 지도첩은 경상도 지역의 군현 지도와 주요 군사지도로 구성되어 있었다. 경상도 지역을 제외한 355종의 각 지도는 지역의 크기에 따라 도면 크기가 다르다. 지도를 펼쳤을 때 가장 작은 도면은 세로 34.4㎝, 가로 50㎝, 가장 큰 도면은 세로 146.7㎝, 가로 114㎝로 차이가 있지만, 지도 표지인 첩장(帖粧)의 크기는 세로 35㎝, 가로 25㎝로 같다.
현재 『1872년 군현지도』는 경상도 지도첩 1개를 포함하여 총 359개의 청구기호로 관리하고 있으며, 462장의 지도는 1990년대 보존 수리와 개장을 통해 낱장 형태로 보관하고 있다. 주요 군사지역인 신흥산성, 삼천포, 통영의 경우, 원상태가 경상도 지도첩에 포함되어 있지 않은 접포장 형태였다. 따라서 현재 주1와 주2, 「통영지도(統營地圖)」[^3]는 각각의 청구기호로 관리하고 있다. 경기도 음죽현, 강원도 울진현, 함경도 삼수부를 포함하여 일부 표지에는 지도를 간행한 날짜와 관직명이 새겨진 관인(官印)을 찍어 놓았다.
『1872년 군현지도』의 편찬 배경은 흥선대원군이 중앙집권적 통치 체제를 확립하고, 정치적 기반을 마련하기 위한 정책과 관련이 있다. 이는 1871년(고종 8) 의정부(議政府) 주관 아래 전 국토의 실정을 파악하기 위해 전국 각 군현의 읍지를 제작하면서 시작되었다. 주요 군사지역을 포함한 전국 차원의 지도집 제작 사업을 추진한 결과, 1872년 조선시대 마지막 관찬 지도집인 『1872년 군현지도』가 편찬되었다. 1872년 3월~6월에 각 지역에서 제작한 지도를 도별로 수합하였는데, 그 결과 경기도 40장, 충청도 52장, 전라도 84장, 경상도 104장, 강원도 28장, 황해도 42장, 평안도 85장, 함경도 24장 등 총 320장의 군현 지도와 진보, 목장, 산성 등 군사지역을 포함한 주요 지역 총 142장의 지도가 모였다.
총 462장으로 구성하였다. 320장의 군현 지도와 142장의 군사지역 지도를 포함한 채색 필사본 지방 지도집이다. 지도에 반영된 지리정보와 구성은 지도 제작 당시의 사회적 상황과 지리 인식을 담고 있다. 첫째, 142장의 군사지역 지도는 1866년과 1871년 두 차례의 양요를 겪으면서 국방 정책을 강구하는 방법 중 하나로 제작되었다. 지방의 실정을 파악하고, 서양의 침략에 적극적으로 대응하기 위하여 전국 차원의 지도 제작 사업을 벌인 것이다. 일부 지도첩 표지에 표기된 지도의 제작 시기를 통해, 『1872년 군현지도』의 제작은 계획부터 수합까지 1년도 채 걸리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짧은 시간에 제작되었지만, 진영(鎭營)을 별도로 그린 진지도에 해방(海防)과 관련한 내용을 구체적으로 실었다. 또 지도에 그려 넣은 화포청(火砲廳)과 포수청(砲手廳), 척화비(斥和碑) 등을 통해 지도의 제작 목적을 알 수 있다.
둘째, 군현 지도에 훼철된 서원(書院)과 주4 등의 지리정보가 수록되어 있는데, 이는 흥선대원군이 새롭게 시행한 정책의 결과이다. 지도를 통해 변화된 사회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도로와 장시(場市), 점막(店幕) 등의 이름과 위치 정보는, 조선 후기 상업 발달로 지역 물산(物産)의 유통과 경제활동이 활발하게 이루어졌음을 보여 준다.
마지막으로, 이전에 제작된 책 형태의 방안식 군현 지도와 달리, 세로 1m 정도의 회화식 대형 지도로 제작된 점 또한 지도의 제작 목적과 활용에 의도가 있었음을 방증한다. 이는 지도 제작 당시의 지리적, 사회적, 군사적, 경제적, 인문적 상황을 한 화면에 보다 자세히 담기 위해 선택한 방법이다. 군현 지도뿐만 아니라, 회화적으로 그 지역의 모습을 상세히 보여 주는 142장의 군사 주요 지역의 지도를 통해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제작 목적만큼 462장의 지도에 기록된 정보가 상세하고 정확하지는 못하였다. 1년이 안 되는 짧은 기간에 지도 제작이 이루어진 만큼 지리정보를 정확하게 파악하기 힘들었고, 지도에 지리정보를 표현하는 방법이나 형식 또한 체계적이지 못하였다. 따라서 『1872년 군현지도』는 지역에 따라 제각각의 화풍이 반영되어 있으며, 일부 지역의 경우는 그 편차가 심하게 나타나기도 한다.
조선시대 마지막 관찬 지도집인 『1872년 군현지도』는 일정한 크기와 형식을 갖춘 책 형태의 이전 관찬 군현 지도집과 달리 통일성이 모자란다. 하지만 이 시기 변화된 정치적, 경제적 상황과 군사적 내용을 담고 있고, 당시의 각 지역 모습을 여과 없이 보여 주고 있어 사료로서 의미가 있다. 또한 19세기 말 기존의 회화식 군현 지도 제작 기법이 총체적으로 사용된 대표적인 지도로서, 당시 전국의 지도 제작 양상을 살펴볼 수 있는 자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