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2년 군현지도』는 흥선대원군 집권기에 국가 지도 편찬사업의 일환으로 추진된 전국 군현지도집이다. 1872년 3월부터 6월에 걸쳐 각 군현에서 자체적으로 완성된 지도가 도별로 수합되었는데, 그 수효는 모두 461장에 이른다. 이 지도들은 현재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에 소장되어 있으며, 경기도 40장, 충청도 52장, 전라도 84장, 경상도 106장, 강원도 28장, 황해도 42장, 평안도 85장, 함경도 24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1872년 군현지도』의 제작은 당시 정권을 잡은 흥선대원군이 중앙집권적 통치 체제를 확립하고 정치적 기반을 마련하기 위해서 각 지방의 정보를 수집한 것과 관련이 있다. 전 국토의 실정과 군사력에 대한 현황 파악은 이미 1871년부터 이루어지고 있었으며 1872년에는 관방(關防) 지역을 포함한 전국 군현을 대상으로 대형의 지도를 기획하였다.
『1872년 군현지도』는 군현의 지도뿐만 아니라 진영지도, 산성지도, 목장지도 등 군사시설을 그린 지도가 함께 포함되어 있다. 이 지도들은 비교적 큰 지면에 그려진 낱장의 채색필사본으로, 각각이 첩(帖)으로 분책된 형태이다. 지도를 펼쳤을 때의 크기는 가장 작은 지도는 34.4×50㎝, 가장 큰 지도는 146.7×114㎝로 지도마다 크기가 서로 다르고 편차도 크지만 첩장(帖粧)의 크기는 35×25㎝로 동일하다. 일부 지도첩에는 지도를 간행한 날짜와 관직명이 새겨진 관인(官印)이 찍혀 있다.
『1872년 군현지도』에는 제작 당시의 사회적 상황을 이해할 수 있는 몇 가지 특징적인 내용이 상징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첫째, 진영(鎭營)을 별도로 그린 진지도에 해방(海防)과 관련된 내용을 구체적으로 기록하여 지도를 군사적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내용이 구성된 점은 병인양요(丙寅洋擾)와 신미양요(辛未洋擾)를 겪으면서 국방태세를 정비하고 군사시설을 파악하고자 했던 의도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둘째, 지역 곳곳에 훼철된 서원(書院) 및 사창(社倉)이 표시되고, 화포청(火砲廳)과 포수청(砲手廳), 척화비(斥和碑) 등이 그려진 것은 흥선대원군이 새롭게 시행한 정책의 결과물로 변화된 사회적 상황을 상징하는 내용을 적극적으로 반영한 것이다. 셋째, 도로와 장시(場市), 점막(店幕) 등의 이름과 위치 표시가 상세한 점은 조선 후기 상업발달로 지역 물산(物産)의 유통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었음을 나타낸다.
『1872년 군현지도』는 이처럼 제작 당시의 지리적, 사회적, 군사적, 경제적, 인문적 상황을 한 화면에 담기 위해 대형지도로 제작한 의도가 엿보인다. 그러나 제작 의도만큼 지도에 기록된 정보가 상세하고 정확하지는 못했다. 이는 감영의 하달을 받은 각 군현에서 짧은 기간에 지도를 제작하면서 소장하고 있던 지도를 확대해서 전사(轉寫)하는 정도에 그쳤기 때문으로 보이며 지역 실정에 따라 비중을 둔 내용과 표현방식도 다르게 제작되었다.
조선 왕조에서 시행한 전국 군현지도 편찬사업의 마지막 성과물로 평가되는 『1872년 군현지도』는 이전의 관찬(官撰) 군현지도집과 달리 통일성은 결여되었지만 당시 지방사회의 모습을 여과 없이 보여주는 사료로서 의미를 지닌다. 19세기 말 변화된 정치, 경제적 상황과 군사적 내용을 담고 있으며 기존의 회화식 군현지도 제작 기법이 총체적으로 사용되어 전국 군현의 지도 제작 양상을 살펴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