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에서 편모 슬하의 가난한 집안에서 5남매 중 하나로 태어났다. 가족이 서울로 올라와, 유년시절부터 서울에서 성장했다. 언니 강석제, 오빠 강석우를 따라 토월회에 입단하면서부터 연극배우 활동을 시작했다. 이미 쇠락해 가던 토월회가 1929년 11월 ‘부흥공연’으로 올린 각색극 「즐거운 인생」과 「초생달」(박승희 연출)에 언니와 함께 출연했다. 토월회 신인 배우 시절 그녀의 배역이 알려진 작품은 애란극 「모반의 혈」(1929)의 마테오 역이다. 토월회가 유명무실해지자 그녀는 오빠 강석우, 언니 강석제와 함께 신흥극장에 참여해서 창단작 「모란등기」(홍해성 연출, 1930)에 출연했고, 1931년에는 토월회의 후신인 태양극장의 「사막의 광상곡」(박승희 작, 연출), 「울며 겨자먹기」(남용춘 작, 박승희 연출) 등에 출연했다. 이처럼 언니, 오빠와 함께 태양극장, 명일극장 등에서 활동했고, 영화 「대장안(大長安)」(1931)에 출연하기도 했다. ‘동작이 자연스럽고 신파비극조를 탈피한 대사를 구사하며, 프롤레타리아 계급에서 태어나 부르주아에게 시달려 반감을 품고 저항하는 가련하고 힘있는 여직공이나 처녀 역에 적역’이라는 평가(『동아일보』, 1931.7.2)을 받았다. 1930년대 초반에는 라디오드라마에 출연하는 등 연기의 폭을 넓히기도 했다.
그러나 그녀가 이름을 낸 주력 분야는 가수이다. 극단의 막간 가수로 활동하다가 1931년 콜럼비아레코드사로부터 취입 제의를 받았다. 이때 발표한 「오동나무」, 「방랑가」가 가요계 데뷔곡인데, 대중의 폭발적인 호응을 얻었다. 콜럼비아레코드사에서는 25종 가량의 가요곡을 발표했고, 이글레코드에서는 4종의 음반을 발표했다. 1932년 빅터레코드사로 소속을 옮겨 마해송 작사의 「세상은 젊어서요」 등 87종 가량의 음반을 발표했다. 1935년에는 태평레코드사로 소속을 옮겨서 「살지는 팔월」 등 27종의 음반을 발표했다. 이애리수와 함께 일본에 건너가 일본어로 노래를 취입하기도 했다.
강석연은 연극배우로 활동하다가 1930년대 초반에는 김연실, 김선초, 이경설, 복혜숙, 이애리수 등과 함께 막간 가수로 이름을 날렸다. 그리고 17세인 1931년에 가수로 데뷔하여 25세인 1935년까지 대략 9년 동안 130여 곡을 발표했다. 발표 음반 숫자는 대략 13종 가량으로 추정된다. 가요 작품들의 주요 테마는 이별, 가족 이산, 경제 파탄 등으로 식민지 조선의 비극적 현실을 암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