첩(帖) 형태의 채색필사본으로 총 42장이다. 각각의 지도는 첩으로 분책된 형태이고 첩을 펼쳤을 때의 크기는 작게는 50.2×78.5㎝에서 크게는 140×85.3㎝로 일정하지 않으나 첩장(帖粧)의 크기는 35×25㎝로 동일하다.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의 소장 상태는 수리된 이후의 모습으로, 지도와 첩의 표지가 따로 분리되어 펼쳐진 상태로 배접되어 있다.
황해도지도는 1872년에 전국 군현지도집 편찬사업의 일환으로 제작되었다.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에 소장되어 있는 『1872년 군현지도』 중 황해도 부분에 해당한다. 이 지도들은 군현지도 23장과 진지도(鎭地圖) 14장, 산성(山城)을 그린 지도 5장을 합하여 42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황해도지도는 각 군현에서 자체적으로 완성되었기 때문에 지도마다 표현양식이나 채색기법에서 편차가 크다. 제작 수준에 따라 지리정보를 전달하는 지도적 기능에도 차이가 크게 나타난다. 지도의 내용은 사창(社倉)과 훼철된 서원(書院)이 그려지는 등 당시 흥선대원군 정권 아래에서 새롭게 시행된 정책들을 반영하고 있으며 읍치(邑治), 사찰, 면(面), 리(里), 동(洞), 산성, 령(領), 치(峙), 봉대(烽臺), 진(津), 포(浦), 창(倉), 장시(場市), 역(驛), 향교 등 지역에 대한 정보가 회화적 요소로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지금까지 1872년에 작성된 황해도지도의 제작 경위를 알 수 있는 사료는 확인되지 않았으나 1871년(고종 8)에 시행된 전국 읍지(邑誌)의 편찬 경위와 읍지도의 비교를 통해서 그 관련성을 살펴볼 수 있다. 황해도지도는 사실상 1871년 『해서읍지(海西邑誌)』와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으며, 1872년에 황해도지도를 다시 제작하면서 지면이 확대되었으나 지도의 절반이 『해서읍지』에 수록된 지도와 구도, 묘사 방식이 유사하다.
황해도지도는 이전에 제작된 관찬지도와 비교하여 통일성은 결여되었지만 당시 지방사회의 실정을 여과 없이 보여주는 사료로서 의미를 지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