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저자는 성중성이며, 흔히 ‘창녕성씨 계축보(癸丑譜)’라 불린다. 현재 원본은 전하지 않고 성현의 서문과 성중성의 발문이 후대에 간행된 족보에 수록되어 있다.
이들 서·발문에 따르면, 성중성은 가문에 족보가 없는 것을 한스럽게 여겨 20여년의 노력 끝에 이 족보의 편찬을 완료했다고 한다. 당시만 하더라도 창녕성씨는 시조를 실전한 상태였는데, 성중성은 여러 문헌을 통해 시조 성인보(成仁輔)의 존재를 확인하는 개가를 올렸다.
체제와 내용을 정확하게 알 수는 없으나 서·발문이 있는 것으로 보아 체제는 비교적 완비되었음을 알 수 있고, 본손은 물론 서손·외손까지 포괄했다는 언급에서 내용에 있어서도 내외 자손을 최대한 수렴하려 했음을 알 수 있다.
성현은 자신의 저술 『용재총화(慵齋叢話)』에서 광주이씨(廣州李氏)와 창녕성씨를 당대 최고의 문벌가문으로 평가하였는데, 이 족보의 간행 역시 문벌의식의 발로라 하겠다.
이처럼 계축보는 창녕성씨족보의 출발점으로서 1616년(광해군 8)의 병진보(丙辰譜), 1709년(숙종 35)의 기축보(己丑譜) 등 후간된 족보의 전범이 되었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