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3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810년(헌덕왕 2) 건립. 높이 1.58m, 너비 48㎝, 두께 18㎝. 비문의 내용은 많이 마멸되었으나 인양사(仁陽寺)라는 절에 세워졌던 것으로 추정되어, 창녕 인양사 조성비(昌寧仁陽寺造成碑)라고도 하며, 771년 (혜공왕 7)부터 40여년간의 기록을 한 것이다.
9세기 초의 비로는 비교적 보존상태가 양호한 편인 이 비는 비면에 두께 10㎝ 정도의 불상이 부조(浮彫)되어 있다. 비측과 비음에는 대체적으로 그 당시의 비문에 흔하지 않은 지름 5㎝ 안팎의 행의(行意)를 곁들인 해서(楷書)가 새겨져 있다. 양쪽 비측에 각 두 줄, 비음에는 10행의 배치로 형성되어 있다.
글씨 형태는 일반적으로 당시에 유행했던 당대(唐代) 해서의 범주를 벗어나고 있다. 물론 이 때만 하더라도 중국의 영향을 크게 벗어나고자 한 것은 보이지 않으나, 서체의 도입이 당대보다 좀더 거슬러 올라간, 진한대(秦漢代)의 형태미를 구사하였다는 것은 나름대로의 독자성 추구를 강력히 실천하였다는 의미이다.
표면상에 나타난 것으로는 목간(木簡 : 글을 나뭇조각에 적은 것)의 필의를 느끼게 하는 부분이 있는가 하면, 간혹 백서(帛書 : 비단에 쓴 글)의 필의도 엿보이고 있다. 전체적인 분위기에서는 정도소(鄭道昭)의 해서필의도 상당한 부분에 나타나고 있으며, 부분적으로는 왕희지(王羲之)의 기본도 강하게 나타나고 있다. 이렇듯이 여러 가지 글씨 형태를 동시에 표출하고 있는 것은 입비(立碑) 당시의 서자(書者)가 가지고 있는 새로운 서형태의 전개를 살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