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성읍에서는 3·1운동 전에 이미 이승훈(李昇薰)으로부터 직접 연락의 줄이 닿아 있었다. 이승훈은 서울에서의 독립만세운동계획이 무르익어갈 무렵, 산악지대 동포들도 이 민족적 거사에 참여하여야 된다고 생각하여 의주군 월화면 교회목사 송문정(宋文正)을 창성에 밀파하였다.
창성읍내 교회장로이던 강제희(康濟羲)는 이승훈의 밀지를 전하여 받고, 강정식(康貞植)·전봉재(全鳳梓) 등과 만나 거사계획을 세워 4월 1일 읍내와 각 면에서 동원된 약 2,000명의 군중과 함께 독립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이 때 출동한 일본군 50여 명은 헌병과 합세하여 무차별 사격을 감행함으로써 박찬소와 강정식이 총탄에 맞아 즉사하고, 4·5명이 중상을 입었다.
시위군중은 해산되고 강제희는 이봉근(李鳳根)의 도움으로 4월 2일 만주로 망명하여 계속 독립운동을 하였다. 한편, 동창면 대유동에서는 4월 1일 약 1,000명의 군중이 모여 독립만세시위를 전개하였고, 4월 4일에는 천도교인이, 5일에는 기독교인이 중심이 되어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청산면 학송리에서는 4월 5일 천도교인과 기독교인이 연합하여 만세시위운동을 벌이다가 헌병대와 충돌하여, 사망자 6명, 부상자 25명이 발생하였고, 청산면 청룡리에서도 4월 6일 천도교인 70여 명이 만세시위운동을 벌이다가 헌병대와 충돌하여, 사망자 7명, 부상자 5명을 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