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원군은 개항 이래 일제의 경제적·정치적 침략으로 많은 이권을 빼앗겨, 일제에 대한 저항의식이 강한 지역이었다.
그러므로 이곳의 독립만세운동은 보다 많은 농민들이 규합, 동원되어 대중적인 완강한 항일투지를 발휘하였다는 데 특징이 있다.
창원군내에서 가장 격렬하게 전개된 만세운동은 1919년 4월 3일 삼진(三鎭 : 鎭田·鎭北·鎭東面)에서 일어났다. 3월 28일진동면 고현리 장터의 만세운동을 주동하고 피신한 변상태(卞相泰)·권영대(權寧大)·권태용(權泰容) 등이 재의거를 계획하고, 비밀리에 새로운 동지와 많은 민중을 규합하여, 4월 3일진전면 양촌리 냇가에서 수천명의 군중이 모인 가운데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독립만세를 외침으로써 시작되었다.
이때 연도의 사람들이 모두 호응하여 군중은 5,000여 명으로 늘어났다. 그러나 만세시위행렬이 사동(社洞)다리에 이르렀을 때, 일본헌병 및 보조원 8명과 현지의 일본재향군인 30여 명이 출동, 발포하여 선두에서 태극기를 흔들며 군중을 독려하던 김수동(金守東)이 총에 맞아 현장에서 죽었다.
이때 옆에 있던 변갑섭(卞甲燮)이 태극기를 다시 잡아들고 적중으로 돌진하자, 일본헌병은 칼을 빼어 그의 양어깨를 내리쳐 숨지게 하였다. 이에 격분한 군중은 투석으로 대항하였으나 결국 8명이 현장에서 순국하고, 확인된 부상자만도 22명에 달하였다.
삼진운동 이후 창원군내의 항일저항의식은 한층 고조되어 일본인의 상점 철수를 종용, 협박하는 한편, 일본인에게 고용되는 것을 거절하였다.
또한 이날 웅동면 마천리에서도 500∼600명의 군중이 모여 태극기를 들고 웅천읍을 향하여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연도의 군중이 자진 호응하여 시위군중의 수는 3,000여 명으로 늘어났다.
그러나 진해로부터 일본헌병 6명과 경찰 4명이 급파되면서, 총검으로 군중을 구타하는 등 만행을 자행하여 군중은 해산하고 32명이 검거되었다.
그밖에 창원읍에서도 3월 23일과 4월 2일에 걸쳐서 6,000∼7,000명의 군중이 모여 독립만세운동을 벌였고, 4월 11일에는 가덕도(加德島)에서 400여 명이, 4월 29일에는 상남면 파사정에서 50여 명이 모여 독립만세 시위행진을 전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