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0년(의종 24) 정중부(鄭仲夫) 등에 의하여 무신정권이 성립되면서 신분 질서의 해이와 하극상의 풍조 등으로 사회적 동요를 가져와 지방관의 탐학과 빈곤에 시달리던 농민 및 노예 등 하층민에 의한 반란이 전국적으로 일어났는데, 그들의 반란 가운데 가장 먼저 일어난 것은 북계(北界 : 지금의 平安道)에서 일어난 것이었다.
1172년창주 사람들은 그 수령이 사랑하던 기생을 죽여 이를 아문(衙門)에 내버리는 등 민란을 일으켰는데, 이 창주의 민란이 일어나던 해에 성주(成州 : 지금의 평안남도 성천)와 철주(鐵州 : 지금의 평안북도 철산)에서도 민란이 일어났는데, 서북면병마사 송유인(宋有仁)은 이를 막지 못하고 사직하였다.
그 뒤를 이은 우학유(于學儒)도 또한 이를 막지 못하였다. 이러한 북계 3주의 민란은 수령들의 가렴주구와 횡포에 대한 반항이었던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