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주서원 묘정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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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주서원 묘정비
창주서원 묘정비
서예
유적
국가유산
충청북도 옥천군 이원면에 있는 조선후기 창주서원 창건 과정을 기록한 묘정비. 비.
시도자연유산
지정 명칭
옥천 창주서원 묘정비(沃川 滄州書院 廟庭碑)
분류
기록유산/서각류/금석각류/비
지정기관
충청북도
종목
충청북도 시도기념물(1996년 01월 05일 지정)
소재지
충북 옥천군 이원면 이원3길 24 (이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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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충청북도 옥천군 이원면에 있는 조선후기 창주서원 창건 과정을 기록한 묘정비. 비.
내용

1697년(숙종 23) 건립. 1996년 충청북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비신의 높이 169㎝, 너비 89㎝, 두께 44.5㎝.

비문의 글씨체는 예서(隷書)인데, 아래쪽이 마멸되어 지은이와 쓴 이를 확인할 수는 없으나 각각의 첫 글자인 “恩”과 “安”은 은진(恩津) 송시열(宋時烈)과 안동(安東) 김수증(金壽增)이다. 원래 비문은 1689년(숙종 15)에 짓고 쓰여졌으나 비를 세우지 못하다가 1697년에 가서 추기(追記)를 더해 세웠다. 추기도 예서이지만 비문 서풍과는 다소 상이하며, 짓고 쓴 사람은 미상이다.

창주서원은 이곳 출신으로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활약하다 금산 전투에서 순절한 중봉(重峯) 조헌(趙憲, 1544∼92)과 유학자 신독재(愼獨齋) 김집(金集, 1574∼1656)의 덕을 기리기 위해 창건되었다. 몇 차례 서원 건물을 옮겨 다니다가 1689년 이산(伊山) 서쪽 기슭의 경승지에 건립하였다. 그 뒤 청나라 황제의 사액(賜額)을 받게 되자 그간의 내력을 적어 이 비를 세우게 되었다.

참고문헌

『한국금석문대계(韓國金石文大系)』 2 -충청남북도편-(원광대학교출판국, 19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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