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본의 현존 여부는 미상이며, 당시의 서문은 후대에 간행된 족보에 실려 있다.
청송심씨족보는 1545년(명종 1) 심통원(沈通源)이 순천에서 간행한 을사보(乙巳譜)를 초간본으로 하여 1562년(명종 17)에는 전주부윤 심전(沈銓)을 중심으로 임술보(壬戌譜)가 편찬되었고, 1578년(선조 11)에는 심의겸을 중심으로 무인보(戊寅譜)가 편찬된 바 있다. 이 족보는 그 연장선상에서 간행된 것으로 심장세의 아우 심희세(沈熙世)의 역할이 많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심장세의 서문에 따르면, 심희세는 보학에 조예가 깊어 일찍이 해동씨족지(海東氏族誌)의 편찬을 계획하였으나 착수하지는 못했고, 청송심씨족보를 수정하여 간행에 대비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를 완수하지 못하고 사망하자 심장세가 그의 수정 초보를 바탕으로 영주에서 간행한 것이 바로 이 족보인데, 흔히 기축보(己丑輔)라 불린다.
원본이 없어 체제를 알 수는 없지만 선대의 사실(史實), 비문(碑文) 등을 권수에 첨부했다는 기록으로 보아 체제와 내용이 비교적 완비된 것으로 생각된다. 참고로 요사이에 간행된 청송심씨족보에 따르면, 위의 임술보, 무인보 그리고 이 기축보는 미간본으로 표기되어 있어 간행 여부에 대해 세밀한 검토가 요구된다.
이처럼 기축보의 간행 여부에 대해서는 의문점이 있기는 하지만 기록상 청송심씨족보의 4간본에 해당하며, 1712년(숙종 38) 심단(沈檀)·심득량(沈得良) 등이 중심이 되어 간행한 임진보(壬辰譜: 5卷) 편찬의 중요한 저본이 되었다는 의의가 크다.
참고로 청송심씨족보는 임진보 이후에도 1843년(헌종 9), 1873년(고종 10), 1918년(戊午)에 이르기까지 족보가 연차적으로 간행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