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02년(숙종 28) 건립. 1980년 충청북도 유형문화재(현, 유형문화유산)로 지정되었다. 비신 높이 4.2m.
비신(碑身) 위에 팔작지붕 모양의 덮개돌을 얹은 일반 형식인데, 1980년 비의 보호를 위해 비각(碑閣)을 세웠으나 비문은 거의 풍화되어 거의 판독되지 않는다. 비문은 박세당(朴世堂)이 짓고 글씨는 최창대(崔昌大)가 썼다.
비문에는 1605년(선조 38)에 문과에 급제한 뒤 승문원을 거쳐 예문관(典籍)을 지냈고, 그러다가 1614년(광해군 6) 폐모(廢母)사건에 연루되어 파면되었으며, 그 뒤 인조반정에 가담하여 다시 관계에 나아갔던 그의 생애와 주요 활동이 적혀있다. 특히 정묘호란 때 국왕 인조를 강화도로 호종(扈從)하는 한편 청과의 강화(講和)를 주장했다거나 병자호란 때 청과의 평화 관계를 모색할 수밖에 없음을 직시하고 홀로 청나라 진영에 들어가 화의(和議) 교섭을 성사시키는 등 현실적 외교정책을 주장한 면모가 잘 기술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