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출신. 서울 협성신학교(協成神學校)를 졸업하고 북감리교 목사가 되어 해주 남본정(南本町) 교회에서 교역생활을 하였다.
1919년 2월 당시 중앙기독교청년회 간사로 있던 박희도(朴熙道)로부터 독립운동에 관한 계획을 전하여 듣고 서울에서 이필주(李弼柱)의 안내로 이승훈(李昇薰)·오화영(吳華英)·이갑성(李甲成) 등을 만나 기독교 측 대표로 독립선언서에 서명 날인하고, 3월 1일 태화관(泰華館)의 독립선언식에 참여하였다가 체포되었다.
1920년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2년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재판과정에서 재판장이 박희도로부터 독립선언운동에 참여할 것을 권유받았느냐는 질문에 대하여, “나는 권유를 받고 참여한 것이 아니라, 박희도로부터 독립운동의 말을 듣고 기뻐서 자진하여 참가하였다.”고 대답하였다 한다.
출옥한 뒤에 만주로 망명, 봉천성(奉天省)을 중심으로 민중교화사업과 전도사업을 통하여 독립운동을 계속 전개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