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경남도 함흥 출신. 1918년 함흥고등보통학교·함흥농업학교·영생중학교의 3·4학년 학생들로 구성된 함산학우회(咸山學友會)를 조직하였다.
이듬해 3·1운동이 일어나 함흥에 독립선언서가 전달되자, 함산학우회 동지들과 3월 3일 함흥의 독립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또한 독립운동 소식을 신속히 널리 알리기 위하여 박상보(朴相甫)가 제작한 『독립신문(獨立新聞)』의 배포책임을 맡고 활약하다가 일본경찰에 붙잡혀 1년 6월의 형을 선고받고, 1920년 9월에 출옥하였다.
1921년 4월 신흥우(申興雨)·장덕수(張德秀) 등 76명의 동지들과 조선교육조사위원회를 발기하여 각종 교육실태를 조사하였으며, 민족교육을 추진하였다. 1923년 8월 함경남도도민대회 집행위원이 되어 독립정신을 고취하는 「생(生)의 충동(衝動)」이라는 제목의 연설을 하여 일본경찰의 경고를 받았다.
1925년 조선청년연합회 상무위원, 전조선노동총동맹 준비위원, 동아일보 기자로 활동하다가 재검거되어 잔혹한 고문을 받고 옥사하였다.
1968년 대통령표창, 1980년 건국포장, 1990년 애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