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운 ()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 전기에, 횡간현감 등을 역임한 문신.
이칭
운지(澐之)
삼지(三池)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500년(연산군 6)
사망 연도
1520년(중종 15)
본관
화순(和順)
주요 관직
횡간현감
관련 사건
기묘사화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정의
조선 전기에, 횡간현감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본관은 화순(和順). 자는 운지(澐之). 호는 삼지(三池). 대대로 전의에서 살았으며, 일찍이 김정(金淨)과 같이 공부하였다.

생애 및 활동사항

1518년(중종 13)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벼슬길에 진출하였는데, 당시 현량과천목(賢良科薦目)에서 지조와 행실이 바르고 학식과 재행(才行)이 있다고 하였다. 횡간현감이 되어서는 정사를 바르게 펴고 송사(訟事)를 사리에 맞게 처리하니 아전들이 두려워하고 백성들이 잘 따랐다.

이에 임금이 옷감 한 벌을 내려 격려하였다. 1519년 기묘사화로 파직되어 고향에 내려갔는데, 이듬해 이신(李信)이 고사(告辭)에서 대사성 김식(金湜)이 도망중에 있을 때 “나를 받아줄 사람은 최운과 영해부사 이윤검(李允儉)뿐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고 하여 이에 연루, 체포되어 추국을 받고 전가족이 강계로 추방되어 그 곳에서 죽었다. 죄가 풀리자 그의 아내가 유해를 가지고 고향으로 돌아와 장사지냈다.

참고문헌

『중종실록(中宗實錄)』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호보(號譜)』
『기묘록보유(己卯錄補遺)』
『대동야승(大東野乘)』
• 항목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사실과 다른 내용, 주관적 서술 문제 등이 제기된 경우 사실 확인 및 보완 등을 위해 해당 항목 서비스가 임시 중단될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단,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미디어ID
저작권
촬영지
주제어
사진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