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인 ()

고려시대사
인물
고려후기 상장군으로 남로착적병마사를 역임한 관리. 무신.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미상
사망 연도
미상
주요 관직
남로착적병마사(南路捉賊兵馬使)
관련 사건
김사미와 효심의 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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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정의
고려후기 상장군으로 남로착적병마사를 역임한 관리. 무신.
생애 및 활동사항

1185년(명종 15) 장군으로서 상장군(上將軍) 양익경(梁翼京), 낭중(郎中) 최소(崔素)·강용유(康用儒)·최문청(崔文淸) 등과 함께 사신으로 금나라에 갔는데, 이는 앞서 왕태후 임씨(任氏)의 상에 금나라에서 제전사(祭奠使)·조위사(弔慰使)·기복사(起復使)를 보내온 데 대한 답례였다.

1193년 김사미(金沙彌)가 운문(雲門: 지금의 경상북도 청도), 효심(孝心)이 초전(草田: 지금의 경상남도 울산)에 웅거하여 기세를 떨치므로 정부에서는 대장군 전존걸(全存傑)로 하여금 장군 이지순(李至純)·이공정(李公靖)·김척후(金陟侯) 등을 거느리고 가서 적을 치게 하였다.

출정 장군의 한 사람인 이의민(李義旼)의 아들 이지순이 적과 내통함으로써 전세가 불리하게 되자, 관군의 총지휘관인 전존걸은 어찌할 바를 몰라 마침내 자살하고 말았다. 이러한 때 상장군으로서 남로착적병마사(南路捉賊兵馬使)가 되어 남적을 치러가서 1194년 2월 김사미가 투항하여 항복을 청하였으나 그를 죽였다. 이후 좌도병마사(左道兵馬使)로서 정예 군사 수천 명을 이끌고 남적(南賊)을 공격하였는데, 강릉성(江陵城)에 이르러 군대를 매복시켰다가 갑자기 습격하여 150명의 목을 베었다.

윤10월 좌도병마사로서 남적과 싸우면서 한 번도 싸우려 하지 않고 시간만 끌어 비용만 허비한다며 탄핵 당하였다.

참고문헌

『고려사(高麗史)』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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