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래 정씨(東萊鄭氏). 속명은 태선(太先), 호는 금오(金烏). 전라남도 강진 출신. 아버지는 용보(用甫)이며, 어머니는 조씨(趙氏)이다.
어릴 때부터 서숙(書塾:서당)에서 유서(儒書)를 공부하였으며, 1912년 3월금강산마하연사(摩訶衍寺)로 출가하여 도암선사(道庵禪師)의 제자가 되었다.
그 때부터 화두(話頭)를 잡고 마하연선원에서 선을 닦다가, 안변 석왕사(釋王寺)내원암(內院庵)으로 옮겨 용맹정진하였다. 1921년 오대산 월정사(月精寺)에서 안거하다가, 같은 해 8월 범어사 금강계단(金剛戒壇)에서 일봉율사(一峰律師)로부터 구족계(具足戒)를 받았으며, 통도사 보광선원(普光禪院)과 천성산 미타암(彌陀庵) 등지에서 정진하였다.
1928년 3월 예산 보덕사(報德寺)의 보월선사(寶月禪師)를 찾아가, “시방세계를 투철하고 나니, 없고 없다는 것 또한 없구나. 낱낱이 모두 그러하기에 아무리 뿌리를 찾아봐도 없고 없을 뿐이다(透出十方界 無無無亦無 個個只此爾 覓本亦無無).”라는 오도송(悟道頌)을 올리자, 오도를 인가하여, 그 밑에서 제자의 도리를 다하면서 보임(保任:깨달은 내왕을 더욱 갈고 닦음.) 하였다.
그러나 1924년 12월 보월선사가 죽자 보월선사의 스승인 만공선사(滿空禪師)가 1925년 2월 덕숭산 정혜사(定慧寺)에서 건당식(建幢式:스스로 일가를 이루는 법회)을 베풀어주고 전법게(傳法偈)를 주었다.
“덕숭산맥 아래 무늬 없는 인(印)을 지금 전하노라. 보월은 계수나무에서 내리고 금오는 하늘 끝까지 날아가네(德崇山脈下 今付無文印 寶月下桂樹 金烏徹天飛).” 그 뒤 10여년 동안 전국을 다니면서 보임하였다.
특히 서산 안면도의 백사장에서 몇 명의 승려들을 데리고 걸식하며 고행한 일이나 하심(下心)을 기르기 위하여 2년 동안 행한 거지생활, 만주의 수월선사(水月禪師)를 찾아 1년 동안 함께 수행한 일화 등은 수행인의 귀감이 되고 있다.
1935년 김천 직지사(直指寺) 선원의 조실로 있으면서 후학들을 지도하였고, 이어서 안변 석왕사, 도봉산 망월사(望月寺), 지리산 칠불선원(七佛禪院), 서울선학원(禪學院)의 조실 및 회주(會主)로 있으면서 선풍(禪風)을 선양하였다. 제자들을 지도함에 있어 ‘불법(佛法)을 향하여 목숨을 던지는’ 자세로 공부할 것을 강조하였고, 언제나 앞장서서 용맹정진하고 운력(運力)하여 모범을 보였다.
1954년 5월 불교정화운동이 시작되자 전국비구승대회 추진위원회 위원장으로 선출되어 불교계의 정화를 위하여 헌신하였다. 1955년에는 대한불교조계종 부종정(副宗正), 1956년봉은사(奉恩寺) 주지, 1957년 구례 화엄사 주지, 1958년 대한불교조계종 총무원장을 역임하였으며, 1961년 캄보디아에서 열린 제6차 세계불교도대회 한국수석대표로 참석하였다.
만년에는 전국의 여러 선원을 다니면서 선풍을 떨치고 중생제도에 힘을 쏟았으며, 1967년 속리산 법주사 주지로 취임하여 종풍(宗風)을 선양하다가 1968년 10월 8일 “무로써 종을 삼는다(無念爲宗)”는 말을 남기고 나이 72세, 법랍 57세로 입적(入寂)하였다. 제자로는 월산(月山)·범행(梵行)·월남(月南)·탄성(呑星)·혜정(慧淨)·월탄(月誕) 등 50여 명이 있으며, 저서로는 ≪금오집≫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