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이라는 개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정치학이나 사회학에서 통일보다 훨씬 더 널리 쓰이는 통합이라는 개념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통합은 일반적으로 ‘2개 이상의 단위체가 하나의 사회단위로 이전해 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상호 이익을 증진하기 위한 집단적 행위’라는 점에서 무력에 의한 병합이나 외부세력에 의해 하나의 국가로 편입되는 경우와는 달리 자발적 행위로 이해된다.
통합 가운데 가장 어렵고 또 그 결과가 가장 큰 정치적 통합은 2개 이상의 정치적 단위가 하나의 정치적 단위로 합쳐지는 것이다. 이것을 위해서는 기관통합·정책통합·태도통합·공동체의식이 필요하다. 한반도의 경우, 남북한이 지난날 하나의 정치적 단위였으므로 재통일이라고 할 수 있다. 통일에는 평화적 통일과 무력적 통일이 있으며, 그 형태에 따라 단방국가(單邦國家) 또는 연방국가로 나타난다. 그리고 연방국가와 비슷하나, 그보다는 느슨한 국가연합이 있다.
한국의 통일정책은 1994년에 여야 합의로 만든 「민족공동체 통일방안」이 있다. 이 방안은 3단계로 구성되어 있으며, 1단계 화해 협력 단계, 2단계 남북연합 단계, 그리고 3단계 통일국가 완성으로 되어 있다. 역대 한국 정부는 이 통일방안에 근거하여 대북정책을 제시해 왔으며, 이 통일방안에서 정당성을 구하였다.
한편 통일에 대한 기본 입장은 크게 세 측면으로 설명할 수 있다. 첫째, 국내법적 측면이다. 국내법적으로 대한민국은 한반도의 유일 합법정부로서 그 주권은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 전체에 미친다. 즉, 대한민국이 한반도와 한민족을 독점적으로 대표하는 유일대표권을 가지며, 북한정권을 부인한다는 것을 뜻한다.
둘째, 대외적 측면이다. 북한 불승인정책은 대외적으로 1970년대 초까지는 이른바 할슈타인원칙을 적용하여 대한민국과 외교관계를 맺고도 북한과 외교관계를 맺는 나라와는 단교하여 ‘2개의 코리아’정책을 부인하였다. 이러한 가운데에서도 1970년대 초까지는 국제연합의 참관 아래 남북한동시총선거를 실시해 통일정부를 세운다는 입장을 취하였다. 그러나 1972년 「7·4남북공동성명」이 발표된 이후에는 국제사회에서 실질적으로 작용하는 ‘2개의 코리아’론을 수락하고, 이 인식 위에서 남북한의 협상을 통한 평화적 통일을 지지하고 있다.
셋째, 정부정책적 측면이다. 통일이라는 과제가 법적으로 달성될 수 있는 것이 결코 아니라는 점에서 특히 1970년대 이후에는 국내법적 체계를 때때로 뛰어넘는 신축적인 정책들을 추진하고 있다. 그 이유는 통일이 민족의 지상과제이기는 하지만 전쟁을 치러가면서까지 추구하여야 할 절대가치는 아니라는 점이다. 그리고 이러한 입장은 자연히 전쟁재발의 방지와 평화정착을 앞세우는 경향을 보여주고, 나아가서 결국 통일을 여러 개의 중간단계들이 개입된 하나의 연쇄적 과정으로 파악하는 점진주의적 입장으로 연결된다.
1970년대 초 미국과 소련의 긴장완화가 이루어지고 미국과 중국의 관계가 개선되면서 그 물결은 한반도에도 파급되었다. 이에 따라 1971년 8월부터 남북적십자회담이 시작되었으며, 그것을 계기로 고위급 정치교섭이 은밀히 진행되어 1972년 「7·4남북공동성명」이 발표되었다.
「7·4남북공동성명」은 통일의 3대원칙으로, 외세에 의존하지 않는 자주의 원칙과 전쟁이나 폭력의 수단에 의존하지 않는 평화의 원칙 및 민족대단합의 세 가지 원칙을 제시하였다. 한국이 이 3대원칙에 합의하였다는 것은 대한민국 정부가 취해 온 통일정책의 일대 전환을 의미하였다.
첫째, 그것은 북한정권을 협상의 실체로 인정함을 의미하였다. 따라서 할슈타인원칙을 버리게 되었으며, 국제사회가 ‘2개의 코리아’론으로 기우는 경향을 수용하게 되었다.
둘째, 그것은 국제연합을 통해서가 아니라 남북한 당사자들 사이의 직접적이며 평화적인 협상을 통해 통일문제에 접근함을 의미하였다. 이는 한반도문제의 탈국제연합화를 수용함을 의미하였다.
남북공동성명의 발표 이후 남북대화는 두 가지의 차원에서 활발히 진행되었다. 하나는 남북적십자회담으로, 6·25전쟁 동안 남북으로 갈라진 이산가족을 찾아 연결해 주는 사업을 다루었다. 다른 하나는 남북조절위원회 회담으로, 정치적·경제적·군사적 문제들을 다루었다.
이처럼 남북한관계에 새 국면이 열린 시점에서 박정희 대통령은 국내 정치체제를 전환시켰다. 그는 1972년 10월 제3공화국 헌법을 유신헌법으로 대체시켜 제4공화국을 출범시켰는데, 남북대화의 효율적인 추진을 위해 대통령의 권한이 강화되어야 한다는 명분을 제시하였다. 이 때 북한 역시 개헌을 토대로 김일성의 권력을 강화하였다.
제4공화국의 출범과 함께 박정희 대통령은 자신의 대북·통일정책을 이론화한 「통일과 외교에 관한 특별선언」을 발표하였다. 1973년 6월 23일 발표된 이 선언에서 대한민국은 사실상 ‘2개의 코리아’론을 수락했다. 그리고 이 「6·23선언」에서 출발하여 남북한의 불가침협정 체결 및 남북한의 국제연합 동시가입안을 제의하였다.
대한민국의 이러한 제의들을 북한은 철저히 배격하였다. 북한은 대한민국의 이 같은 제의들이 분단을 고착화시킨다고 주장하면서 그 대신 1973년 6월 23일 「5대강령」을 제시하였는데, 그 핵심은 주한미군의 철수와 ‘고려연방국’ 창설 및 ‘고려연방국’ 아래에서의 국제연합 가입이었다. 이어 북한은 1973년 8월 28일 대한민국의 내정을 이유 삼아 남북대화의 중단을 선언하였다.
1974년부터는 미국과 북한 사이에 회담을 열어 평화협정을 맺어 휴전협정을 대체시키고자 제의하였다. 이러한 대결 속에서도 대한민국은 몇 차례 건설적인 제안들을 내놓았다. 1974년 8월 15일에는 ‘평화통일 3대 기본원칙’을 천명하였다. 이어 1975년 가을, 미국의 키신저(Henry Alfred Kissinger) 국무장관이 ‘관련 당사국 회담’을 제의했을 때 이에 동의하였다.
1979년 1월에는 ‘무조건 대화 재개’를 제의하였고, 북한이 이에 응해 ‘변칙대좌’가 성립되었으나 결실은 없었다. 이어 7월에는 미국 카터(Jimmy Carter) 행정부와 공동으로 남북한 및 미국 3자의 ‘책임 있는 고위 당국자 회담’을 제의하였다. 북한은 이 제의 또한 외면하였다.
1981년 제5공화국이 출범을 앞두고 전두환 대통령은 1981년 1월 12일 ‘남북한 당국 최고책임자의 상호방문’을 제의하였고, 6월 5일 이 제의를 되풀이하였다. 북한은 이 제의를 거부하였다.
북한의 입장은 1980년 10월 노동당 제6차대회가 채택한 「고려민주연방공화국 수립안」을 수락하라는 것인데, 이 속에 포함된 「10대 시정방침」을 수락할 때 통일이 가능하다고 북한은 주장하였다. 북한안에 대한 체계적인 답변이 1982년 1월 21일 ‘민족화합민주통일’방안으로 나타났다.
이 방안은 두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첫째 부분은 남북한 기본관계 잠정협정을 맺어 남북한 관계를 평화적으로 관리하자는 내용이고, 둘째 부분은 남북한이 ‘통일헌법’을 제정하여 이것을 기초로 ‘통일민주공화국’을 세우자는 내용이다. 북한은 이 제의도 거부하였다. 그 뿐만 아니라, 1983년 10월 미얀마 수도 양곤을 방문한 제5공화국 정부의 요인들에게 폭탄테러를 가하였다.
이 사건이 북한의 국제적 이미지를 격하시키자 북한은 1984년 1월 남북한과 미국의 3자회담안을 공개 제의하고, 같은 해 9월 ‘수재민 구호품 제공’을 제의하는 등 대화노선으로 전환하는 인상을 보여주었다.
한국은 북한의 ‘구호품’이 필요 없었으나 1986년 가을 서울에서 열릴 아시아경기대회와 1988년 가을 서울에서 열릴 올림픽대회를 성공시키기 위해서는 북한의 협력이 필요하다고 판단하고 북한의 제의를 받아들여 남북대화를 재개시키는 전기를 마련하였다. 그리하여 1984년 가을 남북적십자회담이 재개되었고, 이어 최초의 경제회담이 열렸으며, 이와 병행하여 체육회담도 열렸다. 1985년에 들어와 남북한관계에는 새로운 진전들이 나타났다.
남북국회 사이에 예비회담이 열렸다. 이 예비회담은 아무런 진전을 보지 못하였으나, 그것은 분단 이후 최초의 국회회담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컸다. 그 해 가을 남북한은 마침내 분단 이후 처음으로 인적 왕래와 문화적 교류를 실현시켰다. 그 해 10월 대한민국의 노신영 국무총리와 북한의 국가부주석 박성철(朴成哲)이 국제연합의 동시 초청을 받고 유엔에서 연설하였으며 비공식 접촉을 가졌다. 그러나 1986년 1월 20일 북한측은 한국의 팀스피리트 훈련을 이유로 1985년의 일련의 회담을 연기시켰다.
1988년 2월에 한국에서는 노태우 대통령이 이끄는 제6공화국이 출범하였다. 제6공화국은 공산권과의 관계 개선 및 북한과의 대화 모색에 역점을 둔 북방정책을 추진하였다.
이와 관련해 우선 1988년 7월 7일 북한을 민족공동체의 일원으로 인정하는 전제 위에서 북한의 서방권과의 관계개선을 돕겠다는 뜻의 대통령선언을 발표하였으며, 1989년 9월에는 「한민족공동체통일방안」을 제의하였다. 그러나 북한은 두 가지 제의를 모두 거부하였다.
1989년 10월 베를린장벽의 붕괴를 시발로 세계 곳곳에서 공산정권들이 연쇄적으로 무너지는 가운데 냉전질서가 해체되었다. 국제정치에서는 화해와 협력의 분위기가 대세를 이루었다. 이러한 배경에서 소련과의 수교를 성사시킨 한국은 북한을 상대로 ‘정부 고위급 회담’을 제의하였다.
북한이 이에 응함에 따라 1992년까지 여덟 차례에 걸쳐 남북 총리급회담이 열렸으며, 1991년 12월에는 「남북 화해와 협력 및 교류·협력에 관한 기본 합의서」와 「한반도 비핵화 선언」이 남북 사이에 채택되었다.
1991년 10월에는 남북한이 국제연합에 동시 가입했다. 그러나 1993년 한국에서 김영삼 정부가 출범한 직후 북한은 핵확산금지협정(NPT) 탈퇴를 선언하였다. 미국은 곧바로 북한과의 쌍무회담에 들어갔으며, 1994년에는 미국의 중재 아래 남북정상회담 개최가 합의되었다. 그러나 1994년 7월 8일에 김일성의 사망이 발표됨으로써 이 회담은 무산되고 말았다. 곧이어 미국과 북한 사이에 제네바에서 합의 틀이 성립되었으며, 이 제네바 합의 틀에 따라 북한은 핵개발 동결을 약속했고, 미국은 한·미·일의 공동출자에 따라 북한에 경수로 2기를 지어주기로 약속했다. 그러나 남북한 사이에는 공식적 대화가 열리지 않았으며, 1996년 가을에는 북한 잠수정의 동해안 침투사건이 발생해 남북관계는 다시금 경색되었다.
1998년 2월에 한국에서는 김대중 정부가 출범하였다. 김대중 정부는 북한의 무력도발을 용인하지 않을 것이며, 북한의 붕괴를 유도하지도 않을 것이라는 전제 아래, 북한을 포용하는 화해정책을 취할 것임을 선언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정책의 일환으로 정경분리 원칙을 제시하고 남북 사이의 민간 경제협력을 추진하였다. 한국은 북한을 점진적으로 변화시켜 협력과 공존의 무대로 이끌어 내려고 하였다.
이후 김대중 대통령이 1998년 2월 취임사에서 “북한이 원한다면 정상회담을 개최할 용의가 있다”고 한 이래, 당시 정부는 기회 있을 때마다 남북정상회담과 특사교환을 제의하면서 북한의 호응을 촉구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한반도 냉전구도 해체와 항구적인 평화 및 남북 화해협력을 촉구하는 「베를린 선언」(2000.3.9)이 나왔고, 이후 북한이 남북정상회담을 개최할 수 있다는 의사를 표명해 옴에 따라 2000년 3월 17일 중국 상하이에서 남북 당국자 간 첫 접촉을 가졌으며, 그 후 베이징에서 수 차례 협의를 가졌다. 그 결과 4월 8일 남북한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초청에 따라 김대중 대통령이 평양을 방문하여 남북정상회담을 개최한다”는 데 합의하였다.
이후 5차례의 남북 간 판문점 준비접촉 과정에서 절차 관련 문제와 항목별 구체적 내용은 1994년 남북정상회담 절차합의서를 기준으로 하기로 하였으며, 경호·통신 등 실무접촉과 체류 일정 및 선발대 방북 등의 일정도 합의하였다.
김대중 대통령은 2000년 6월 13일부터 15일까지 평양에서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처음으로 남북정상회담을 갖고 이산가족 문제, 경제 및 사회·문화교류 문제 등 5개 항을 담고 있는 「6·15 남북공동선언」을 채택하였다.
그리고 노무현 정부는 통일·대북정책과 관련하여 역대 정부가 지향해 온 남북 간 평화공존과 공동번영을 계속해서 추구해 나가며, 「6·15 남북공동선언」 등 남북 간의 기존 합의사항과 성과 역시 존중하고 승계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러한 입장에서 노무현 정부는 출범과 함께 대북정책으로 「평화번영정책」을 제시하였다.
「평화번영정책」은 ‘한반도 평화 증진’과 ‘남북한 공동번영 실현 및 동북아 공동번영 추구’라는 두 가지 목표를 설정하였다. ‘한반도 평화 증진’은 북한 핵문제를 비롯한 안보현안을 해결하는 토대 위에서, 남북 간 실질협력을 증진시키면서 군사적 신뢰구축을 통해 불안정한 정전체제를 항구적인 평화체제로 전환시켜 나간다는 것이다. ‘남북 공동번영 실현 및 동북아 공동번영 추구’는 남북 모두의 이익을 창출·확대할 수 있도록 경제협력을 활성화시켜 나감으로써 중장기적으로 남북경제공동체를 건설하고, 이를 통해 동북아 이웃국가들의 번영에도 기여하겠다는 것이었다.
한편, 노무현 대통령은 2007년 10월 2일부터 4일까지 평양에서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남북정상회담을 가졌으며 남북은 정전체제의 종식과 항구적인 평화체제 구축의 필요성에 대해 공감하고, 직접 관련된 3자 혹은 4자 정상들이 한반도 지역 내에서 만나 종전을 선언하는 문제를 협력적으로 추진하는데 합의하였다. 또한 정치, 군사, 경제, 사회문화 분야에서 공동사업을 하기로 하였다.
2008년 출범한 이명박 정부는 기존의 통일 및 대북정책의 성과와 한계를 바탕으로 정상적 남북관계 정립 및 실질적 관계발전 추진의 관점에서 남북한 주민의 행복한 삶과 통일기반 마련을 궁극적 목표로 실용과 생산성에 기초한 정책 추진, 원칙에는 철저하되 유연한 접근, 국민적 합의에 기초한 정책 추진, 남북협력과 국제협력의 조화를 추진원칙으로 하는 「상생 공영의 대북정책」과 그 구체적 추진전략으로서의 「비핵 개방 3000구상」을 제시하였다.
2013년 출범한 박근혜 정부는 과거 남북대화·교류 중심의 포용정책과 원칙 중심의 대북정책이 모두 북한의 의미있는 변화를 견인하지 못했으며, 핵개발 및 도발 저지에 한계를 드러낸 점에 주목하였다. 그러한 문제의식은 기존 대북정책의 한계를 극복하고 대북정책을 둘러싼 갈등을 해소하는데 기여할 새로운 대북정책에 대한 국민적 여망에 부응하는 것이기도 했다. 이러한 인식에 입각하여 박근혜 정부는 과거 대북정책의 장점을 수용하여 통합적으로 접근하면서 남북 간의 신뢰형성을 핵심으로 하는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를 제시하였다.
신뢰는 남북관계 발전과 한반도 평화정착, 통일기반 구축을 가능케 하는 동시에 국민적 지지와 국제사회와의 협력하에 대북정책 및 외교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할 수 있는 사회적 자본으로 간주하였다. 신뢰 형성에 초점을 맞춘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는 남북간 신뢰, 국민적 신뢰, 국제사회와의 신뢰를 모두 포괄하는 의미를 지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