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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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산시설이나 사회간접자본 등에 자본을 투하하는 행위를 가리키는 경제용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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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생산시설이나 사회간접자본 등에 자본을 투하하는 행위를 가리키는 경제용어.
내용

근대적 의미의 투자는 일정한 기간에 공장·기계·건물·구축물이나 원료·제품의 재고 등 자본재가 증가하는 현상을 말하며, 자본형성이라고도 한다.

자본재 증가 금액을 통계적으로 정확하게 평가하기가 곤란하므로 자본의 감소 부분을 공제하지 않고 포함시켜 사용하는 총투자(總投資) 개념을 사용하기도 하며, 때로는 감소되는 부분을 공제한 순투자(純投資) 개념도 사용한다.

투자를 내용에 따라 분류하면, 설비투자·건설투자·재고투자로 나눌 수 있다. 설비투자는 기계설비에 대한 투자뿐만 아니라 공장건설이나 댐의 건설과 같은 영업용건설에 대한 투자까지도 포함하는 넓은 뜻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건설투자도 협의로는 주택건설투자에 한정되지만, 광의로는 영업용건설도 포함한다. 그리고 재고투자는 제품재고·재공품(在工品)·원재료로 구별된다.

그리고 투자주체가 민간이냐 공공기관이냐에 따라 사적 투자(私的投資)와 공공투자(公共投資)로 구분되는데, 사적 투자는 기업의 이윤추구를 목적으로 계획되고 투하되지만, 공공투자는 개인에게 맡기기에는 공공의 이익이 달성되지 않거나 사적인 이윤이 보장되지 않아 투자가 이루어지지 않는 분야에 하는 투자이다.

공공투자에는 구체적으로 거대한 자본이 필요하므로 민간자본으로는 그 경비를 충당할 수 없어 공공기관이 투자하는 경우와, 경제 불황으로 민간의 투자가 위축되어 있어서 경기활성화의 촉매제로 나타나는 투자가 있다.

현대에는 경제활동의 일반적인 기반을 제공하는 운수·통신·동력·용수·교육·위생 등의 사회간접자본의 건설에 대한 공공투자의 구실이 중요시되고 있다. 기타 내국인의 해외에 대한 투자인 해외투자와 외국인의 국내투자인 외국인투자 등이 있다.

고려시대까지는 화폐의 유통이 활발하지도 않았고 자급자족 생산이었으며, 주택의 건설도 주민의 협동적 건설이었다. 또한, 시장도 물물교환시장이었기에 근대적인 의미의 투자를 통계적으로 수치로 내기는 곤란하다.

단지, 정부의 세출예산안에서 교통·통신 시설에 대한 투자, 교육시설에 대한 투자 등의 공공투자를 개략적으로 알 수 있을 뿐이다. 또한, 자급자족적 농업중심의 사회였고 현물납세였기에 재정의 공공투자 지출도 정부의 부역, 물적 동원, 토지의 분여 등에서 간접적으로만 알 수 있다.

근대적인 투자활동은 19세기 이전에는 수공업·광업의 활동에서 주로 살펴볼 수 있다. 전쟁무기와 관수품, 귀족들의 생활품을 제조하는 관영수공업은 고대사회에서부터 성립되어 신라시대·고려시대를 통하여 계속 발전하였다.

조선시대에도 중앙의 30개 관청과 지방의 8도 감영에 관영수공업장이 있어 그곳에서는 부역제에 의하여 등록, 동원되는 장인들이 일하였다.

18세기 이후에는 관영수공업이 쇠퇴하고 장인의 등록제가 1746년경 폐지됨에 따라 민간수공업이 발달하기 시작하였다. 더욱이 도시인구의 증가, 상업의 발전, 장인의 납포장화(納布匠化)로 인한 부역 동원의 면제, 대동법의 실시로 인한 관수품의 시장 구입, 도시인의 기호발달로 인한 가공품의 개발 등이 원인이 되어 주문생산에서 점차 상품생산으로 발달하였으며, 일부는 규모가 커 공장제 수공업장으로 발달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은 민간수공업자들의 투자활동으로 소비자들에게 상품이 직접 판매로 연결됨에 따라 시전상인들에게 주는 타격이 컸으므로 시전상인과 치열한 경쟁을 하였다.

시전상인들은 우세한 자본력으로 장인들의 원료나 제품을 매점하여 결국 상업자본이 수공업 투자에 확대되어 상업자본에 의한 수공업자의 선대제적(先貸制的:미리 돈을 줌) 지배나 공장제 수공업으로 발전해 나갔다.

근대 이전에 광업에 관한 투자는 주로 외국에 관한 세공(歲貢)문제, 전쟁물자 조달, 귀족의 사치품 수요 충당 등의 목적 때문에 이루어져 왔다. 허가받은 민간에 의한 광물채취 허가도 일부 있었지만, 주로 정부에서 농민을 부역 동원하여 직접 채취·개발하는 방식이었다.

그러나 1651년(효종 2) 설점수세제(設店收稅制)가 도입되어 정부에서 광물산지에 제련장과 부대시설 등 사회간접자본을 설치해 주고, 영세한 민간자본도 광산개발에 투자하도록 유도하여 민간인이 광물을 채취하면 그 일부를 세로 바치게 하였다.

이와 같은 설점수세제 아래서는 자본가인 물주가 자본을 투자하고, 관리자인 혈주·덕대 등이 광산노동자를 고용하여 광물을 채취해서 그 이윤을 분배하고 세로 납부하였다. 이러한 방식으로 근대적인 광산 투자개발이 시작되었다.

1876년(고종 13) 개항 이후 외국인의 국내투자가 크게 확대되었는데, 특히 일본은 상업·광업·철도 등 모든 분야에 투자를 확대하였다.

처음에는 조선에 대한 지배권이 불확실하여 상업에만 투자하였으나, 청일전쟁 이후 지배권이 확실해짐에 따라 공업 분야에 집중투자하여 1911년에는 일본인 소유의 공장은 184개로 조선인 소유의 두 배 이상이 되었다.

이처럼 외국인이 국내 상공업시장의 지배를 확대해 나감으로써 시전·객주·여각·보부상 등 우리 전통의 상업체계가 붕괴되고, 사영수공업도 존립 기반을 상실하게 됨에 따라 근대적 상공업의 건설을 바라는 민족의 여망이 높아지게 되었다.

이에 1884년 서울·부산·인천 등에 약 40여 개의 민족계 회사가 설립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들은 상당수가 동업조합·단체·관영기관이었으며, 그 기능과 조직면에서도 근대적이라고 보기 어려웠다.

갑오경장으로 인하여 자본주의 제도가 등장하게 되면서 여러 산업에 걸쳐 활발히 기업투자가 이루어졌는데, 은행업·해운업·광업·제조업 등 많은 분야에 투자가 활성화되어 1911년 민족계 기업의 수는 86개에 달하였다.

이처럼 문호개방 이후 우리 나라 사람들의 상공업 진출 노력은 활발하였지만 일본 제국주의에 비하면 우리 나라의 상공업은 자본과 기술면에서 열세에 놓여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민족계 기업들은 상업·무역업·운수업 등 제한된 기술·자본으로도 사업이 가능한 부문에 집중투자하였으며, 제조업의 진출은 섬유·식료품 등에 국한되었다.

1911년 일본은 <조선회사령 朝鮮會社令>을 공포하여 우리 나라에서 회사를 설립하거나 우리 나라 밖에서 설립된 회사가 우리 나라에 지사를 설립하고자 할 때에는 조선총독부의 허가를 받도록 하였다.

이는 일본의 공업과 경쟁이 예상되는 부문에 대하여는 투자를 불허하고 토지투자, 농산물 증산을 위한 수리시설투자, 광업 부문 등 특정 부문에만, 그것도 일본인 우선으로 투자를 허용하여 우리 나라 안의 공업투자를 제한하려는 속셈에서였다.

1920년 허가제의 회사령을 신고제로 바꾸어 일본 자본이 우리 나라에 투자하는 것을 쉽게 하는 한편, 우리 나라 사람에게도 공업투자의 길을 넓혀 놓았다. 1920년대의 공업발달은 영세 중소기업이 중심을 이룬 단순 가공형 경공업에 의하여 주도된 것이었다.

1930년 말 우리 나라 안의 제조업체 중 자본금이 100만 원 이상의 대기업은 12개에 불과했던 반면, 자본금 5만 원 미만의 영세기업 수는 75%에 달하였다. 1920년 99개에 불과했던 우리 나라 사람이 경영하는 기업 수는 1929년에는 362개로 4배 가까이 늘어났다.

1937년 일본의 중국 침공 이래 우리 나라 공업은 전시물자 동원체제로 바뀌어 탄광·제철·화학·화약·조선·전력 등 각종 중화학공업 부문에 많은 공장들이 세워졌다. 그러나 이러한 발전은 우리 나라 공업의 균형된 발전을 저해시켰다.

광복 이후 한국경제는 일본이 남긴 식민지 경제구조로 많은 혼란이 있었다. 전체 공업의 90% 이상을 차지하던 일본인들이 물러감에 따라 많은 공장시설의 가동이 중지될 수밖에 없었다.

여기에 중화학공업 중심의 북한과 경공업 중심의 남한이 분단되고 광복 당시, 전력 생산의 92%를 차지하던 북한에서 전력공급을 중단함으로써 생산 위축은 더욱 가중되었다. 그 때문에 1946년의 공업생산은 1939년의 그것에 비하여 무려 91%나 감소하였다.

1950년 6·25전쟁 이후 미국의 원조와 인플레이션을 통한 재정투융자에 힘입어 한국경제는 급속히 복구되어 1956년까지는 거의 모든 산업생산이 전전(戰前) 수준을 웃돌게 되었다. 1950년대의 공업구조는 공업의 재건과정에서 기간산업 공장 설립 추진과 발전소 건설 등 중화학공업의 육성 노력도 전개되었지만 경공업이 중심을 이루고 있었다.

이는 6·25전쟁으로 인한 생필품 공급의 부족을 타개하고 민생을 안정시키기 위하여 경공업의 육성이 촉진된 것과 더불어 미국의 원조물자는 그것을 원료로 한 가공공업의 발달을 촉진시켰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나친 경공업 발전은 1956년을 전후해서는 생필품의 공급 과잉으로 많은 중·소 상공업자가 도산하는 부분공황 사태를 일으키게 되었다.

1962년에는 제3공화국이 민생고 해결과 자립경제의 실현을 주된 목표로 삼아 경제개발5개년계획을 세우고 추진함으로써 우리 나라 경제는 새로운 전환을 맞이하게 되었다. 수출촉진 중심의 투자유도정책을 실시하여 제1·2·3차 경제개발5개년계획 기간중 수출은 연평균 43%, 39.6%, 41.6%라는 신장률을 각각 기록하게 되었다.

그리고 투자에 대한 재원이 없었기에 외자도입을 통하여 많은 공장을 건설하고 기업을 확장하였다. 그러나 무절제한 차관 도입으로 국내 자본재 공업의 성장이 저해되고, 차관 기업이 부실해져 1969년의 경우 부실기업은 은행관리 기업 85개 사를 포함하여 208개에 달하였다.

이에 대한 대책으로 1972년 8월 3일 사채 동결과 제2금융권 확충으로 집약되는 8·3긴급 금융조치를 취하여 기업은 자금상의 여유를 얻게 되었다. 따라서 1973년 이후 중화학공업 분야에 집중적으로 시설투자를 확대해 나갔다.

그러나 지나친 중화학공업의 육성은 기술 축적의 부족, 중복·과잉 투자, 외자 의존 등 시행착오로 인하여 인플레이션과 외채누적 등의 여러 문제를 발생시켜 다시 재정비하게 되었다.

1988년의 경우 47조 7310억 원의 총투자가 이루어졌는데, 국내 총자본은 37조 3661억 원이 형성되었고, 민간투자액은 32조 3808억 원, 정부투자액은 4조 9853억 원, 대외투자액은 10조 3649억 원이었다. 국민 총가처분소득 중에서 민간이 소비지출하고 다른 일부는 정부가 소비지출하게 된다. 그리고 나머지 부분이 투자재원으로 활용된다.

1994년부터 1996년까지의 총투자액을 보면 각각 106조 원, 123조 원, 129조 원으로 나타났는데, 국민 총가처분소득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각각 35.0%, 38.6%였다. 국내 총투자율은 1996년의 경우 1995년의 37.4%보다 높은 38.6%를 나타내 총저축률 34.6%를 상회하였다.

그리고 1996년 대외투자율은 1994년 이후의 추세가 이어져 계속 저조한 기록을 보였다. 총저축률은 정부 저축률이 정부의 인건비 및 물건비 지출의 증가세가 확대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간접세 수취가 큰 폭으로 증가한 데 힘입어 다소 높아졌으나, 민간 총저축률이 낮아져 1995년에 비해 1.6% 낮은 34.6%를 기록하였다. 국내 총저축률은 고정투자가 꾸준히 증가한데다가 재고도 늘어 1995년보다 1.2% 높은 38.6%를 기록하였다.

참고문헌

『한국경제백년사』(경제평론사, 1982)
『한국경제사』(조기준, 일신사, 1982)
『조선시대상공업사연구』(강만길, 한길사, 1984)
『한국경제사』(권병탁, 박영사, 1985)
『조선왕조재정사연구』(김옥근, 일조각, 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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