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4년 학병으로 징집당하여 평양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 제42부대에 배속된 김완룡(金完龍)·박성화(朴性和)·최정수(崔正守) 등은 일본군을 탈출하여 항일전선에 참가하기로 하고 비밀결사를 조직하였다.
이 결사의 행동강령은 ‘① 우리는 생명을 바쳐 조국의 독립을 쟁취한다. ② 우리는 일체의 이데올로기를 초월하여 단결한다. ③ 우리는 우리의 조직명령에 복종한다. ④ 우리는 지성과 관용으로 동지애를 굳힌다. ’고 정하였다.
그리고 김완룡이 총책, 박성화가 참모장으로 선임되고, 참모로는 전상엽(全相燁)·최홍희(崔泓熙)·이도수(李道秀)를, 부대조직책으로는 최정수가 담당하였다.
이들은 같은 부대에 배속된 학병 30여 명을 규합하는 동시에, 이웃에 있는 일본군 제47포병부대·제44보병부대·제48공병부대·제50치중병부대로 조직을 확대시켜 동지를 포섭하였다.
이들은 일단 부대를 탈출하면 한만국경지대와 또는 부전고원(赴戰高原) 등 산악지대에 근거지를 설치한 뒤 일본군과 유격전을 전개할 것을 목표로 설정하였다. 그리고 소총·대검·실탄·의약품·식량 등을 사전에 비축하고 거사개시일을 같은 해 11월 1일로 정하였다.
결행준비가 순조롭게 진행되었으나 이들의 거사를 사전에 탐지한 한국인 헌병보조원의 밀고로 발각되어, 70여 명의 주동자가 붙잡힘으로써 거사는 실패하고 말았다. 1945년 군법회의에 회부되어 최고 8년에서 3년까지의 징역형을 선고받고 복역하였으나 8·15광복과 동시에 출옥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