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해안지구 방어를 담당하고 있던 국군 제3사단이 영덕과 강구지역에서 북한군 제5사단의 남하를 저지하고 있는 동안에 안동지역으로 남하한 북한군 제12사단이 동남진하여 1950년 8월 10일 포항 북쪽의 흥해를 점령하였다. 이에 따라 국군 제3사단의 퇴로가 차단되고 포항이 함락될 위기에 놓이게 되었다.
당시 포항시내에는 해군 경비부 요원 약 300명, 공군 포항기지부대 1개 중대, 경찰과 청년방위대 약 3,000명이 있었고, 제3사단 후방지휘소가 위치한 포항여자중학교에 학도의용군 71명이 있었다. 이들은 조직적으로 전투임무를 수행할 수 있는 지휘체계가 확립되어 있지 않았다.
8월 11일 증강된 연대규모의 북한군이 소티재를 넘어 포항시내로 진입하였다. 제3사단 후방지휘소는 학도의용군을 외곽에 배치하고, 행정병 60여 명을 통제하여 학교 뒷산을 점령하게 하는 한편 일부 병력으로 보급품과 기밀문서를 후송하였다.
학도병들은 스스로 2개 소대를 편성하여 8월 11일 새벽 4시부터 11시간 동안 북한군의 침공을 저지하였다. 학도병들이 사투를 벌이는 동안에 제3사단 요원들은 이미 철수를 완료한 상태였다. 이 전투에서 71명의 학도병 중 47명이 전사하고 4명이 실종되었으며, 13명이 포로가 되었다. 이와 같은 학도병들의 분전감투로 북한군의 포항시내 진출이 지연됨으로써 제3사단 사령부와 기타 지원부대 및 경찰, 그리고 행정기관이 무사하게 안전지대로 철수할 수 있었다.
포항이 피탈되자 육군본부는 8월 15일 예비대로 확보하고 있던 민부대(민기식 부대)를 영천에서 포항 방면으로 이동시켜 포항을 탈환하도록 했다. 그리고 8월 17일에는 퇴로가 차단된 채 고립되어 있던 제3사단을 독석동에서 해상을 통해 구룡포로 철수시켰다.
민부대는 북한군이 유엔 해군의 함포사격으로 상당한 피해를 입고 포항 외곽의 야산지대로 숨어들자, 이 기회를 이용해 8월 18일 포항 시내로 진입해 포항을 탈환하고 추격작전을 벌여 포항 북쪽의 진지들을 점령하였다. 포항을 탈환한 다음날인 8월 19일, 구룡포로 철수하여 부대정비를 마친 제3사단이 민부대와 임무를 교대하였다. 이후 제3사단은 8월 31일까지 포항 북방 흥해 일대에서 북한군 제5사단과 공방전을 계속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