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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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사
개념
조선시대 궁중의 급변을 전할 때나 궐문을 드나들 때 표로 지녔던 신분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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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시대 궁중의 급변을 전할 때나 궐문을 드나들 때 표로 지녔던 신분증.
내용

제도의 확립은 1508년(중종 3)에 시행된 것으로 목질은 버드나무를 사용하고 글씨는 붉은 색으로 쓰도록 하였다.

명령을 전달할 때는 전달하는 사람의 직위를 선전관으로 한정하고 표에 명령을 전달하는 사람의 직위와 성명을 쓰고 ‘信(신)’자를 낙인해 믿음을 굳게 하였다. 일면에 어인을 찍어 명령을 발한 사람을 분명하게 밝혔다. 다만 전달할 명령은 표에 쓰지 않고, 선전관의 입을 통해 직접 전하도록 하였다.

표신은 세 가지의 종류가 있다. 첫째, 왕이 직접 말하는 표신을 선전표신(宣傳標信)이라 하는데 원형으로 만들어졌다. 둘째, 왕이 출타해 행재소(또는 행궁)에 있어서 왕세자가 왕을 대신해 궁성을 지킬 때 돌발적인 사태가 생겨 긴급히 명령을 전하기 위해 쓰는 것을 휘지표신(徽旨標信)이라 하였다.

표신의 규격은 길이가 2촌, 너비가 1촌 3푼의 정사각형이다. 셋째, 왕이 출타해 부재중인 경우, 왕세자가 어리거나 없어서 정무를 대리하지 못하고 왕비가 궁성을 지키면서 왕정을 대리하다가 일어난 돌발사태 때 쓰는 것을 내지표신(內旨標信)이라 하였다.

규격은 한쪽 끝이 뾰족한 목패로 길이는 2촌, 너비가 1촌 3푼으로 휘지표신과 같다. ≪경국대전≫에 의하면 왕이 군국의 긴급사로 출타해 행재소에 있을 때 궁성에 돌발사태 등 급박한 사항이 생기면, 궁성을 책임지고 있는 왕세자는 휘지표신을 사용해 은밀히 부왕에게 사건의 전말을 보고해 재가를 얻은 뒤 처리하였다.

다만 행재소가 멀어 지체함으로써 돌이킬 수 없는 긴급한 중대 상황에 대해서는, 먼저 처리한 뒤에 결과를 보고해 후결하도록 정해져 있었다. 조선시대 표신을 사용한 것은 1508년 중종이 위장 박이온(朴而溫)과 유계장(柳季漳)에게 명해 군사를 이끌고 경회루에 모이게 한 일과 1514년 존경각(尊經閣) 화재 때 표신을 써서 군대를 동원한 일이 있었다.

1545년(인종 1) 인종의 병이 위독할 때와 1766년(영조 42) 영조가 육상궁(毓祥宮)에서 환궁할 때 모반을 염려해 표신을 사용, 담연군(擔輦軍)을 교체한 일이 있다.

이와 같이 볼 때, 표신은 군을 장악한 군관에게 은밀히 내려지는 명령으로, 선전관이 표신을 왕으로부터 받으면 즉시 목적지로 달려가서 군을 동원시켜야 했다. 그리고 명령을 받은 군관이 태만히 하였을 때는 군령에 따라 효수(梟首)하도록 되어 있다.

참고문헌

『경국대전(經國大典)』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대동야승(大東野乘)』
집필자
권오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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