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천민란 ()

근대사
사건
1864년(고종 1) 1월 16일황해도 풍천부에서 일어난 민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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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1864년(고종 1) 1월 16일황해도 풍천부에서 일어난 민란.
개설

황기정(黃基正)·윤장언(尹章彦)·조여익(趙汝益)·조양록(趙良錄) 등이 부사의 탐학, 이속(吏屬)들의 남징(濫徵)과 강탈에 항거하여 7개의 요구 조건을 내걸고 봉기하였다.

경과

풍천은 소읍임에도 불구하고 원징전(寃徵錢)이 6,000냥이나 되고, 특히 책객(冊客) 송지감(宋持鑑)이 강탈한 액수가 1,640냥이나 되었다. 이를 견디지 못한 부민들이 읍폐 7개조의 요구 조건을 제시하며, 원징전을 일일이 환급하여 줄 것을 관아에 호소하였다.

이에 수교(首校) 안원봉(安元鳳)은 관노비를 소집하여 부민들을 독하게 구타하였다. 이것이 직접적인 계기가 되어 황기정이 주도하여, 윤장언은 발통하고 조여익·조양록 등이 회합하고 관아에 난입하여 부사를 꾸짖고, 서리들의 집 4, 5호를 파괴하였다.

결과

황해감사 서형순(徐衡淳)의 상소를 접한 조정에서는 의금부에 명하여, 부사 신명은(申命溵)을 잡아오도록 하여 금갑도(金甲島)에 정배시켰다.

한편, 감사 서형순은 난민과 이교배들을 감영으로 불러들여 문화현령 김온순(金薀淳), 강령현감 신석희(申奭熙) 등과 함께 조사하였다.

조정에서는 감사의 사건 조사보고에 따라 간사하고 교활한 서리 박인희(朴麟熙), 읍인 노기주(盧基周) 등과 난을 도모한 황기정·윤장언 등 4명을 섬으로 귀향보내고, 간민 오덕의(吳德宜)·김낙기(金洛基)·오달선(吳達善)·여석규(呂錫圭) 등 4명을 먼곳으로 귀향을 보냈다.

그리고 난민 조양록·조여익과 색리(色吏) 이익주(李益周) 등 3명도 귀양을 보냈으며, 또한 부민을 독타하여 민란을 유발시킨 수교 윤재첨(尹在瞻)과 안원봉을 귀양보냈고, 책객 송지감은 1864년 8월 황해감영으로 압송하였다가, 원악도(遠惡島)로 귀양보냄으로써 난은 일단락되었다.

의의와 평가

풍천민란은 전형적인 민란의 양상을 보여주는 것이며, 고종대 민란의 효시를 이룬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한편, 난민들이 제시하였다고 하는 7개조의 요구 조건의 상세한 내용은 알 수가 없으나, 관리들의 불법탐학과 남징에 대한 시정을 요구하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그런데 민란에서 구체적인 요구 조건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은 난민들의 목표와 주장이 점차 뚜렷해져 가고 있음을 말해주는 것으로, 민란이 점차 계획적이며 조직적인 형태로 발전해 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예라 하겠다.

참고문헌

『고종실록(高宗實錄)』
『일성록(日省錄)』
「1860년대(年代)의 민란(民亂)에 관한 연구(硏究)」(최진옥, 『전통시대(傳統時代)의 민중운동(民衆運動)』 하, 풀빛, 1981)
「고종조(高宗朝)의 민란연구(民亂硏究)」(박광성, 『인천교육대학논문집(仁川敎育大學論文集)』 14, 19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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