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9년 1월 30일 대한천일은행(大韓天一銀行)이라는 상호로 설립되었다.
1894년(고종 31) 조선은행·한흥은행(漢興銀行)·제국은행(帝國銀行) 등이 민족자본에 의하여 설립되었지만 자금부족으로 얼마 지나지 않아 문을 닫았고, 1897년 한성은행이 또 설립되었지만 운영과정에서 후에 공립화되었기에 실질적으로 민간설립 민족계의 근대적인 은행으로는 최초의 은행이 되었다.
일본이 1878년 국내에 다이이치은행(第一銀行)을 진출시킨 이후 1889년 제18은행, 1891년 제58은행 등을 진출시켜 한일 양국간의 교역증대에 따른 환 또는 환전업무와 대륙침략을 위한 국내 상권을 잠식시키기에 이르렀다. 따라서 이에 대항하고자 본 은행을 설립하게 되었다.
다른 한편으로, 당시 정부의 각종 수입금을 황성부내(皇城府內)의 대상전(大商廛)에 예탁하였다가 필요시마다 인출해서 사용했는데, 대상전은 평상시 이 자금을 영업자금으로 이용하다가 경영난·경제파동 등으로 원리금의 연체, 회수불능 사태가 빈발하여 이에 대한 대책이 필요하였기 때문이기도 하다.
1899년 민병석(閔炳奭) 등 관리 및 실업가 31명이 발기하여 자본금 5만 6000원으로 운영을 시작하였다. 그 해 3월 18일 인천·목포·부산에 지점을 설치하는 등 사업을 확장해 나가 1905년에 이르기까지 60만 원 내외의 자금을 운전하여 매년 3, 4할의 이익배당을 하였다.
그러나 사업의 확대는 황실의 특혜와 다이이치은행의 지원에 의한 것이었고, 고율의 배당도 경영능력의 부족에 따른 것이었으며, 1905년의 경제위기와 화폐개혁으로 인하여 그 해 6월 말 결산기에 휴업을 할 수밖에 없었다. 1906년 6월에는 자본금을 15만 원으로 증자하여 은행경영은 이전의 관료 중심이 아닌 순수상인들에 의하여 새로 시작되었다.
그러나 순수상인 경영진에는 명목상 정부가 추천한 자이지만, 실제는 일본 재정고문의 지명자로서 일본 금융자본의 이익대변자들이 참여함으로써 진정한 민족금융활동은 많은 제한을 받게 되었는데, 이로써 개성·인천의 구지점이 폐쇄되었다.
1911년 2월 11일 조선상업은행으로 상호를 변경하였고, 1912년 4월 1일 한성공동창고주식회사와 합병하였으며, 1923년 6월 30일에는 원산상업은행과 합병하였다.
1924년 8월 31일에는 조선실업은행과 합병하였고, 이어 1925년 9월 15일 대동은행, 1928년 6월 16일 삼남은행, 1933년 6월 25일 북선상업은행과 합병하였으며, 1935년 6월 22일 부산상업은행을 매수하고, 1941년 10월 2일 대구상공은행을 매수하여, 1950년 4월 24일 한국상업은행으로 상호를 변경하였다.
1956년 3월 3일 기업을 공개하였으며, 1972년 7월에 시중은행으로서는 최초로 민영화되었다. 1987년 7월 13일 주당 500원 주식을 5,000원으로 병합하였다. 1994년 1월 상업증권지분을 제일은행에 매각하였고, 1994년 1월 대한주택공사와 인수불계약을 하였다.
1995년 11월 (주)한양정리계획안을 인가하였고, 1997년 2월 당시 지점 수 246개 점, 출장소 196개 점을 설치, 운영하였다. 1996년 말 당시 주요사업은 자금운용, 수수료, 신탁업무 등이었다.
관계회사로는 한국상업은행유한공사·뉴욕한국상업은행·한국상업은행독일유한회사·인도네시아한국상업은행·상은리스(주)·상업투자자문(주)·상은시스템(주)·상은신용관리(주)·상은파이낸스 등이 있었다.
총자산은 31조 4,369억 원, 자본금 8,500억 원, 예수금 17조 8,800억 원, 총대출금 13조 9,660억 원, 영업수익 2조 2,524억 원이었다. 종업원은 관리사무직 7,695명, 생산직 68명 등을 합쳐 7,763명이었다. 본점은 서울특별시 중구 남대문로에 있었다.
1998년 한일은행과 합병하였으며, 1999년 한빛은행으로 발족하였다. 이후 2001년 우리금융지주(주)에 편입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