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현 출생.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당시 영남 지방에서 공을 세웠다. 1594년 경상우도별장이던 그는 의병장 곽재우(郭再祐) 등과 합세해 적을 물리친 공으로 선조로부터 청람삼승포(靑藍三升布) 2필을 상으로 받았다.
전세가 수그러지자 의병장 김덕령(金德齡)과 함께 휘하의 군사 및 새로 모집한 군대를 거느리고 좌우별장이라 칭하면서 각지의 진지를 보수하고 군대를 훈련시켰다. 1597년 정유재란 때에는 도원수 권율(權慄)의 휘하에서 충청도방어사와 합세해 회덕에서 공을 세우고, 공주에서 분전하다가 부상을 당하였다.
왕이 이 소식을 듣고 내의(內醫)를 보내어 치료하게 하고 양피(羊皮)를 하사하였다. 이듬해 다시 권율의 휘하에서 의병장 정기룡(鄭起龍)과 합세, 경상우도에 주둔한 적군을 격파하였다. 그리고 명나라의 제독 마귀(麻貴)의 특천으로 오위장이 되었다.
사헌부에서는 그의 천한 신분을 들어 체직(遞職: 직분을 교체함.)을 청했는데도 끝내 윤허되지 않았다. 이어 방어사를 거쳐, 1623년(인조 1) 구성순변사(龜城巡邊使)에 보직되었다. 이후 노환을 이유로 상소해 면직을 요청했으나 윤허되지 않았다.
이듬해 부원수 이괄(李适)과 함께 반란을 기도했다는 혐의로 체포, 압송 중 이괄의 도움으로 구출되어 반란군에 가담하였다. 선봉장으로 각지의 관군을 패주시키고 서울을 점령했으나, 길마재[鞍峴]의 싸움에서 패배하였다.
이괄과 함께 도주하던 중 이천에서 부하 장수의 배반으로 살해당하였다. 임진왜란 때부터 역전의 명장으로 능통한 전략과 능숙한 지휘자로서의 명성이 높았다. 무고로 처벌을 받게 되어 부득이 반란군에 가담한 것이라고 알려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