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적은 강원도 고성. 별명은 혁파(革波) 또는 박봉운(朴鳳雲)이다.
고성에서 보통학교를 졸업하였다. 함연호, 박태선 등과 교류하며 사회주의 사상을 받아들인 뒤, 민족해방은 공산주의운동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신념을 가지게 되었다.
1920년대 초반 수성(䢘城)청년회와 고성농민회에서 활동하면서 서울파와 교류하였다. 1924년 12월 조선청년총동맹의 지시에 따라 개최된 관동청년대회 준비위원으로 선정되었다.
1925년 2월 강원도 고성에서 박태선, 김대봉(金大鳳) 등과 사회주의사상단체인 봉화회(烽火會)를 조직하고 집행위원이 되었으며, 조선민중운동자대회 개최를 반대하는 데 앞장섰다. 4월 서울파가 주도하는 전조선노농대회의 준비위원으로 참가하였다.
같은 달 수성청년회와 고성노농회, 봉화회(烽火會)를 이끌고 조선민중운동자대회 반대단체인 전국연합위원회에 가담하였다. 7월 조선청년총동맹의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정되었다. 같은 해 8월 봉화회를 관동사회운동자동맹(關東社會運動者同盟)으로 변경하고 그 집행위원으로서 관동지방을 순회하며 각 지역에서 집행위원회를 열었다.
10월에는 함남청년연맹 창립에 참가하고 집행위원이 되었으며, 상무위원으로서 문천·영흥·정평·금강 지역을 담당하였다. 같은 달 원산 지역 6개 단체 대표회합에 참가해서, 도초소작회와 지주 사이의 분쟁을 조사, 지주에겐 경고문을 보내고 도초소작회에는 위로 전문과 격문을 발송할 실행위원으로 선정되었다.
1925년 말 서울파 공산청년단체인 고려공산청년동맹의 강원도 책임자로 선정되었다. 1926년 1월 원산청년회 집행위원이 되었으나 ‘원산청년회원검거사건’에 연루되어 한 때 일제 경찰의 수배를 받았다. 같은 달 서면(書面)으로 동북노동연맹(東北勞動聯盟) 창립대회에서 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다.
3월 ‘서울 신파’의 한 사람으로서 양명, 한빈, 고광수 등과 함께 조선 사회주의운동선의 통일을 목적으로 하는 ‘레닌주의 동맹’ 결성에 참가하였다. 같은 해 4월 원산노동청년회 정기총회에서 집행위원으로 선정되었다.
7월 고려공산청년동맹 중앙위원회에서 고려공산청년회와 통합할 것을 주장하였으며, 8월 마침내 통일 고려공산청년회의 결성을 실현하였다. 10월 원산 지역 중심의 함남청년연맹 창립총회에 참석하고 집행위원이 되었다. 11월 조선공산당과 고려공산청년회에 가입하였다.
1927년 3월 조선공산당 강원도 당간부 및 고려공산청년회 강원도 책임자로 선정되고, 8월 조선청년총동맹 서면대회 결과 중앙집행위원(강원도 대표)으로 선정되었다.
같은 달 강원도 청년연맹의 선전부 위원으로서 전민족적 정치운동으로의 방향 전환, 마르크스주의적인 중앙집권적 조직 아래 전민족적 청년운동으로의 방향 전환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강원도청년연맹 혁신대회 준비위원과 규약개정 초안작성위원을 맡았다. 그 해 9월에는 강원도청년연맹의 집행위원장이 되었다.
1928년 2월 ‘조선공산당 제3차 검거사건’이 진행되는 가운데 조선공산당 제3차 대회에 강원도 대표로 참석하였다. 3월 고려공산청년회 중앙위원으로서 조선공산당에 파견되어 당 중앙간부로 선정되었다. 이때 정치부 위원을 담당하면서 조선공산당 당칙과 당세칙 제정에 관계하였다.
같은 해 7월 일제 경찰의 추적을 받던 중 자신이 가지고 있던 조선공산당 세칙과 정치논강이 탄로나 ‘조선공산당 제4차 검거사건’을 가져왔다. 1929년 2월 새로 제정된 치안유지법에 따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6년을 선고받았다. 이 때 법정에서 만세를 부르며 일제의 탄압에 저항하였다. 1945년 9월 조선인민공화국 인민위원으로 선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