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해군 때부터 인조 때까지 궁녀로 있던 숙원 한씨의 행적을 그녀의 절개와 지조를 중심으로 그린 내용이다. 작자의 문집 『담정집(藫庭集)』 권9의 『단량패사(丹良稗史)』에 수록되어 있다.
숙원 한씨는 서울 양가의 딸로 이름을 보향(保香)이라고 하였다. 광해군 때에 궁궐에 들어가 궁녀가 되었다. 인조반정이 일어났을 때에 다른 궁녀들은 모두 반정군(反正軍)을 피하여 도망가 숨었다. 그러나, 그녀는 광해비 유씨를 따라 후원 어수당(魚水堂)에 있었다. 반정군이 3일 동안 여러 겹으로 포위하고 압박을 가해오자, 한숙원이 앞으로 나아가 “정의를 앞세우는 반정군이 전 왕비를 이렇게 대우할 수 있는가?” 하고 꾸짖으니, 포위를 풀었다.
숙원 한씨는 뒤에 다시 궁녀가 되어 인열왕후(仁烈王后)의 사랑을 받았는데, 그녀를 시기하는 다른 궁녀가 “보향이 광해군을 못잊어 남몰래 운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인열왕후는 오히려 한숙원의 그러한 태도를 의롭다고 칭찬하며 상급을 내리고, 왕자의 보모로 삼았다. 숙원은 나이 80에 죽었다.
김려는 「한숙원전」의 끝에서 “한숙원은 옛날의 유열(遺烈)이다.”라고 하였다. 그녀는 당대에는 잊혀진 인물이었다. 그러나 자신은 그녀를 의열로 높이 평가한다는 사실을 명확히 밝혀놓은 것이다. 일개의 아녀자가 기개 있는 장부나 할 수 있는 일을 능히 해냈다는 사실이 뜻밖의 커다란 충격으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에, 그녀의 행적을 기리기 위하여 입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한숙원전」은 표면적으로는 어려운 상황을 구차히 모면하려 하지 않고, 정의(正義)를 이끌어 의연히 대처하였다는 점을 말하였다. 그러나 이 작품의 이면적 의도는, 남성이 갖추어야 할 도덕적 규범을 남자가 아닌 여성을 통하여 제시함으로써, 기개와 절조를 상실한 사회 전체의 반성을 촉구한 것이다.
그리고 당시의 몰각되어 버린 도덕적 규범을 만회함으로써, 사회를 건강하게 지탱하여줄 윤리의식을 제시하려 한 것이다. 이미 사람들의 기억 밖으로 사라진 인물을 의미깊게 재조명하였다는 것은 이러한 사실을 잘 말하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