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성여자청년동맹(京城女子靑年聯盟)·서울인쇄직공청년동맹·아현청년회(阿峴靑年會)의 대표 4명이 서울 청년단체의 연합기구 설립에 대한 협의를 한 뒤 1925년 8월 1일 서울의 10개 단체 대표 59명이 모여 한양청년연맹발기회를 개최하였다.
8월 5일 집행위원회를 개최하여 미조직지역의 단체결성을 촉진하고 기왕에 조직된 단체는 연맹에 가입하도록 권장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상무위원을 선출하였는데 서무부는 김조중(金祚中), 조직부는 홍순준(洪淳俊), 교육부는 김익수(金益洙), 조사부는 이순종(李順宗)이 선임되었다.
이 단체는 강연회개최·기관지발간·수해구제 등의 활동을 전개하는 한편, 무산청년운동의 전개, 무산농민의 자각, 형평운동의 이해 촉진 등을 활동목표로 하였다. 1925년 학술연구반·청년문고·연합강좌·신문발간 등을 통한 사회운동을 전개함으로써 일본경찰로부터 집회금지처분을 받았다.
1926년 12월 민족운동과 제휴를 주장한 정우회선언(正友會宣言)에 찬동하고 조선의 사회주의운동은 조합주의적 정치형태로부터 대중적 전민족적 정치의식형태로 방향전환할 것을 선언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