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영언(永言). 한세륜(韓世倫)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한수(韓脩)이고, 아버지는 한희록(韓希祿)이다. 1606년(선조 39)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관직은 지평·헌납, 홍문관부수찬·장악원첨정, 집의·부응교 등 주로 삼사(三司)에서 활동하였다. 붕당정치가 전개되면서 삼사는 왕을 위한 간쟁이나 백관에 대한 탄핵보다는 집권당의 전위기구화하여 자당을 위하여 타당을 공격하는 교두보 구실을 하게 되었다.
광해군 때는 북인들이 정권을 잡아 권력을 휘둘렀기 때문에 삼사는 북인정권을 위한 권력기구가 되었다. 삼사에서 주로 활동한 그도 북인정권의 우두머리인 이이첨(李爾瞻)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이이첨이 주동한 영창대군(永昌大君)의 살해와 인목대비(仁穆大妃)의 폐모론에도 적극 동조하였다. 이러한 그의 행동으로 말미암아 심한 비판을 받게 되었다. 1623년 인조반정 때 이이첨의 당파로 몰려 정의(旌義)에 위리안치되었다가 사사(賜死)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