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군수(君粹). 관직은 가덕첨사·장흥부사에 이르렀다.
1555년(명종 10) 왜적이 왜선 60여척으로 전라도 달량진(達梁鎭)에 쳐들어오자 장흥부사로 절도사 원적(元績), 영암군수 이덕견(李德堅)과 더불어 달량진을 구원하기 위하여 갔으나 왜적이 거짓으로 도망하였다.
이에 절도사 원적이 입성하여 방비하였는데, 적의 수가 너무 많고 원병이 오지 않은 데다가 3일이 지나자 식량이 떨어져 군사들로 하여금 옷과 모자를 벗어 항복하는 모양을 취하도록 하였으나, 왜적이 세가 약함을 알고 공격하여 성이 함락되고 절도사 원적과 함께 죽음을 당하였다.
뒤에 그의 죽음에 대하여 남주역의 벽에 “장흥 백성들이 부모를 잃은듯이 슬퍼하니 한공(韓公: 韓蘊)의 어진 정치를 알겠도다”라는 시가 붙여졌던 것으로 보아 그가 덕정(德政)을 펼쳤음을 알 수 있다.
1683년(숙종 9)에 읍인(邑人)들이 건립한 충렬사(忠烈祠)에 봉사(奉祀)되었으며 병조판서에 증직되었다. 시호는 충의(忠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