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해도 평산 출신.
1907년 한국군 강제 해산 이후 각지에서 의병이 봉기할 때 황해도 평산 도평산(桃平山)에서 4,000여 명의 의병이 모여 의병부대를 편성하고, 당시 목천부사였던 박기섭(朴箕燮)을 의병대장으로 추대할 때 중대장이 되었다.
황해도 각지에서 여러 번 싸워 많은 적을 죽이자 일본군들이 범과 같이 두려워하였다. 1910년 이진룡(李鎭龍)·김정안(金貞安)과 함께 예하에 500여 명의 병력을 두고 20∼80명의 소부대를 편성하여 지속적으로 일본군수비대와 경찰을 공격하였다.
그 해 2월 해주 부근의 헌병분견소를 습격하고, 또 순사주재소를 불태웠다. 3월에는 이진룡과 함께 80여 명을 인솔하고 계정역(鷄井驛) 서쪽에서 수색나온 온정원(溫井院) 헌병분견소의 일본군과 교전을 하였다.
이후 그들은 일본군의 연락과 보급을 끊기 위하여 경의선 선로에 큰 돌을 놓아 기차를 탈선시키기도 하였다. 1914년 붙잡혀 사형을 선고받았다.
1980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