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안북도 용천 출신.
1919년 3·1운동이 발발하자, 평양의 숭덕학교(崇德學校) 교원으로 평안도지방 학생운동의 책임자가 되어 평양의 각 학교 교사 및 학생을 규합,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그러나 일제의 탄압으로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만주 관전현(寬甸縣)으로 망명, 그 곳에서 대한청년단을 조직하여 애국사상의 고취, 독립운동의 선전, 청년단결에 주력하였다.
1920년 안병찬(安秉瓚)·김찬성(金燦星)·김승만(金承萬) 등이 주동이 되어 각지에 산재한 청년단체를 규합, 대한청년단연합회를 결성하자, 이에 참여하여 편집부장으로 기관지 발간에 진력하였다.
이 해 5월 16일 일본군의 피습을 받아 총상을 입고 붙잡혀 총살형이 집행되었으나, 죽음 직전에 중국인의 도움으로 소생하였다.
그 뒤 안동현(安東縣)에 은거하다가 무기구입사건으로 다시 일본군에 붙잡혀 3년간 서울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하였다. 출옥 후 다시 만주로 가서 활동하였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