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안 황사리 고분군 ( )

고대사
유적
경상남도 함안군 법수면에 있는 삼국시대 가야의 널무덤 · 덧널무덤 · 독무덤 등이 발굴된 무덤군.
이칭
이칭
황사리고분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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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경상남도 함안군 법수면에 있는 삼국시대 가야의 널무덤 · 덧널무덤 · 독무덤 등이 발굴된 무덤군.
개설

함안 황사리고분군은 1985년 이래 경상대학교박물관이 실시한 함안 서부지역에 대한 지표조사 과정에서 확인되었다. 1991년 2월 19일∼3월 30일 발굴조사되어 널무덤〔木棺墓〕·덧널무덤〔木槨墓〕과 독무덤이 확인되었다.

이 고분군은 황사리 매곡마을 일대의 나지막한 야산에 위치한다. 야산은 동북쪽의 높은 곳(54m)에서 서남쪽의 낮은 곳(15m)으로 길게 뻗은 나지막한 구릉으로, 맞은편으로는 남강과 한벌들을 바라보고 있다. 유구는 주로 해발 22∼33m 사이의 산복부의 정선부와 사면에 분포하고 있다.

조사된 유적은 널무덤·덧널무덤 47기, 독무덤 3기의 총 50기이다. 대체로 광범위하게 형성되어 있는 판암계(板岩系)의 암반층을 파서 설치하였다. 장축방향은 모두 등고선과 일치하고 있다.

내용

덧널무덤은 풍화암반층을 파서 무덤구덩이〔墓壙〕를 만들고 내부에 시신을 안치하고 유물을 부장한 뒤 덧널을 설치하고 나무뚜껑〔木蓋〕을 덮고 그 위에 약간의 봉토를 쌓아서 만들었다. 이곳의 토질은 풍화암반편이 잘게 부서진 점성이 거의 없는 것이어서 유실이 심해 상단부는 대부분 삭평되고 유구의 바닥 또는 하단부만 남아 있다. 따라서 내부구조를 정확하게 밝히기 어려운 유구가 많았다.

특히, 널의 사용여부에 대한 흔적도 찾을 수 없으며, 어떤 작은 유구는 덧널의 사용마저 의심스러운 상태였다. 다만, 사람뼈와 유물이 비교적 잘 남아 있었던 김해 예안리 덧널무덤의 조사결과 ‘유곽무관(有槨無棺)’이었음이 밝혀졌기 때문에, 이 고분군의 덧널무덤에서도 널이 사용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추정된다.

독무덤은 덧널무덤과 같은 방향으로 작은 무덤구덩이를 파고 그 안에 큰 독을 횡으로 안치해 만든 것이다. 파괴가 극심해 단옹(單甕)인지 이음독〔合口甕〕인지, 어떤 유물을 부장했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알 수 없었다. 유물은 극심한 도굴과 유구 상부의 유실로 인해 대부분 없어져서 부장상태는 정확히 알 수는 없다. 그러나 유구 자체가 소형이기 때문에 많은 유물을 부장한 것 같지는 않다. 출토된 유물은 토기, 철기, 장신구 등이다.

유물의 부장상태는 규칙적이지 못하지만 대체로 토기들은 단벽쪽에 치우쳐서 부장되는 반면, 철기는 유구의 전면에 걸쳐서 확인되고 있다. 유물 중 특징적인 것은 고식도질토기(古式陶質土器)라고 불리는 일군의 토기, 즉 통모양굽다리접시〔筒形高杯〕를 비롯해 서부 경남식의 화로모양그릇받침〔爐形器臺〕, 손잡이달린잔〔把手附盞〕, 굽다리손잡이잔〔臺附把手附杯〕이 집중적으로 발견된다. 머리방향은 대체적으로 동쪽방향을 하고 있다.

의의와 평가

황사리고분군에서는 피장자가 강대한 신분의 소유자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자료는 없다. 유구에 있어서 규모가 큰 덧널무덤은 단 1기도 없고 모두 소형인 점과, 유물에 있어서도 철검이나 고리자루큰칼을 비롯한 의기성(儀器性) 유물이 거의 발견된 바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고분군에 피장된 사람들은 대개 이 지역에 살았던 일반인들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몇몇 유구에서는 다른 무덤들에 비해 약간 많은 철기가 부장된 것에서 차이가 나는 것이 있다. 예를 들면 15점의 쇠화살촉이 무더기로 발견된 제21호분과, 13점의 쇠화살촉과 1점의 쇠도끼가 발견된 제45호분과, 4점의 쇠화살촉과 쇠낫, 쇠도끼, 매우 긴 쇠투겁창〔鐵矛〕이 출토된 제49호분이 바로 그것이다.

특히, 제49호분에서 발견된 쇠투겁창은 실용품이었을 것으로 생각하기에는 너무 길뿐만 아니라 부장된 위치도 유구의 장축과 직교하면서 한가운데서 발견되고 있어서 주목된다. 따라서 쇠투겁창의 부장상태에 의하면 제49호분은 지배집단에 속하는 사람의 무덤이었을 것이다.

황사리고분군 피장자들은 이곳에서 고식도질토기를 만들면서 생활했던 일반인들과 촌주(村主)급으로 생각되는 소수의 지배자들로 구성된 사람들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들의 생활은 대단히 장식적인 토기를 생산하고 있는 점에서 비교적 안정되고 평화로왔을 것으로 추정된다.

전반적으로 이 고분군은 아라가야(阿羅加耶) 지역의 하위고분군으로서 조성연대는 토기자료의 검토 결과, 4세기 전반에서 5세기 초가 중심연대임을 알 수 있다.

참고문헌

『한국고고학사전』(국립문화재연구소, 2001)
「함안황사리분묘군」(경상대학교박물관,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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