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흥부지도 ()

인문지리
문헌
1872년 함흥부에서 함흥읍성 일대를 회화식으로 그린 지도. 고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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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1872년 함흥부에서 함흥읍성 일대를 회화식으로 그린 지도. 고지도.
서지적 사항

채색필사본으로 지도의 크기는 세로 111.6㎝, 가로 76㎝이다. 지도의 뒷면에 표지가 붙어 있어 접으면 첩이 되는 형태이고 첩장(帖粧)의 크기는 35×24.5㎝이다. 현재는 지도와 표지를 분리하고 펼쳐서 배접된 상태로 보관되어 있다.

내용

「함흥부지도」는 1872년 전국 군현지도집 편찬사업의 일환으로 함경도 함흥부에서 작성하여 올린 지도이다.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에 소장된 『1872년 군현지도』 중 함경도 함흥부에 해당한다. 함흥부는 현재의 함경남도 함흥시 신흥군, 영광군, 함주군에 해당하는 지역으로, 1416년(태종 16) 함주목을 함흥부로 승격하여 함경도의 관찰사영(觀察使營)으로 삼았다.

「함흥부지도」는 지도의 중심에 읍성으로 둘러싸인 읍치를 크게 확대하여 배치하였고 주변의 지형은 진한 먹을 중첩하여 험준한 산세를 강조하였다. 산지의 표현과 읍성 아래에 그려진 수목 등의 묘사에서 회화성이 돋보인다. 읍성은 1453년(단종 1)에 축성된 것인데 이후에 개축을 계속하여 이 시기에도 문루와 성벽이 선명하게 남아 있음을 볼 수 있다.

읍성 내부에는 관청 건물과 그 배치가 상당히 자세하다. 관찰사가 집무하던 선화당(宣化堂), 판관(判官)이 집무하던 본부(本府), 객사(客舍)인 함산관(咸山館), 중군(中軍)의 진영인 중영(中營) 등의 주요 건물이 부각되어 있다.

함흥부는 조선 왕조의 발상지로서 남문 밖에는 태조 이성계가 왕위에 오르기 전에 살았던 곳인 본궁(本宮)이 그려져 있고 서운전사(西雲田社)에는 태조가 어릴 때 격구를 했던 격구정(擊毬亭)도 그려져 있다. 동편에는 산줄기를 따라 조상의 능침(陵寢: 임금이나 왕후의 무덤)도 표시되어 있다. 정화릉(定和陵)은 환조(桓祖)와 그의 비인 의혜왕후(懿惠王后)의 능이고, 의릉(義陵)은 도조(度祖), 순릉(純陵)은 도조의 비 경순왕후(敬順王后)의 능이다.

또한 함경도의 중심지에 걸맞게 읍성의 남문과 서문 앞, 상주서사(上州西社), 상선덕사(上宣德社), 퇴호사(退湖社), 덕산사(德山社), 동원평사(東元平社), 상기천사(上岐川社) 등지에는 많은 장시(場市)가 표시되어 있다. 『여지도서(輿地圖書)』에 의하면, 방리는 27개 사(社)로 이루어졌으며, 호구 수는 1만 1708호 5만 9159인, 전결(田結)은 한전(旱田) 5,913결 50부 8속, 수전(水田) 1,295결 95부 2속이었다.

의의와 평가

행정적, 군사적 요충지로서 함흥부의 규모와 실정을 회화적 요소로 생생하게 전달하는 지도로서 가치가 높다.

참고문헌

『여지도서(輿地圖書)』
『조선후기 지방지도: 강원도, 함경도편』(서울대학교 규장각, 민족문화, 2005)
「1872년 군현지도의 제작과 회화적 특징: 전라도지도를 중심으로」(김성희, 명지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5)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e-kyujanggak.s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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