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주에서는 3·1운동 전인 2월 20일 이미 서울에서 박희도(朴熙道)·최성모(崔聖模) 등이 보낸 김명신(金明信)에 의해 독립선언서 300장과 최성모의 서신이 해주읍 남본정(南本町)의 기독교회 목사 오현경(吳玄卿)에게 전달되었다.
오현경은 그날 밤으로 황학소(黃鶴巢)·임용하(林容夏)·이동혁(李東赫)·최명현(崔明鉉)·김창현(金昌鉉) 등과 만나 독립만세운동에 대해 협의하여, 거사 계획을 세우는 한편 각 교인들에게 비밀리에 연락하였다.
3월 1일 오후 2시경남본정 교회에서는 기독교인 180여 명이 모인 가운데, 오현경목사 주재로 독립선언식을 거행하였다. 그 뒤 3월 9일 봉영화(奉永華)를 비롯한 기독교인들은 읍내 남욱정(南旭町) 장터에서 다시 만세운동을 크게 일으키기로 계획하였으나, 사전에 누설되어 예정대로 진행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10일 옹진군의 천도교인 수 백명이 ‘조선독립만세’라고 쓴 큰 기를 들고 해주읍내로 대거 진입하여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이에 전날 만세운동을 일으키지 못했던 기독교인과 이성룡(李成龍)을 비롯한 읍내 주민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이에 합세하게 되면서, 만세시위대열은 해주읍의 큰 거리를 뒤덮었다. 그러나 출동한 일본 기마헌병에 의해 70여 명이 붙잡히고 시위군중은 해산되었다.
한편, 읍내의 기생 일동도 4월 1일 손가락을 깨물어 흐르는 피로 그린 태극기를 들고 나와 독립만세시위행진을 벌였다. 그런데 여성들의 궐기는 민중에게 다시 용기를 북돋아주어 사방에서 많은 사람이 호응하여 인원은 3,000명이 넘었다.
그밖에 3월 9일 최보은(崔溥殷)의 주동으로 석동면에서 만세운동이 있었고, 10일에는 서변면, 12일에는 추화면 청단(靑丹) 장터에서 600여 명의 군중이 모여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17에는 청룡면 영양리에서 이기봉(李起峰) 등의 주동으로 200여 명의 군중이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4월 3일에는 가좌면 취야리 장터와 서변면 문정리, 4월 6일 장곡면 죽천리, 7일 동운면 삼정리, 8일 운산면 백정리 등지에서 각각 독립만세 운동이 전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