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적으로는 방향물질(芳香物質) 중에서 고형이거나 분말상태의 것을 향료라 하고, 액체상태의 방향물질을 향수라고 일컫는다.
향수·향료의 사용범위는 매우 넓다. 그러나 화장품으로서의 향수와 향료는 신체 및 의상에 부향(附香)시켜 청정감(淸淨感)과 함께 정신미화의 효과를 얻는다.
향수·향료를 최초로 사용한 것은 종교의식에서 비롯되었다. 고대인들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향을 신성하게 여긴 나머지 신체를 청결히 한 뒤, 향나무의 가지를 사르고 향나무의 잎으로 즙을 만들어 몸에 발랐다. 대부분의 고대신화가 향나무와 관련되어 있는 사실이 이를 뒷받침한다.
고대의 우리 나라 사람들 역시 향료를 신성시하고 이를 사용하였다. 서기전 2333년에 개국했다는 단군신화(檀君神話)에 의하면 첫 주거지는 태백산 꼭대기 단수(檀樹) 아래였다. 이 사실을 기록한 ≪삼국유사≫의 원주(原注)는 태백산을 지금의 묘향산(妙香山 : 향내가 묘한 산)이라고 하였다.
단(檀)은 박달나무로서 자작나무과의 낙엽교목이나 자단(紫檀)·백단(白檀) 등의 향나무를 총칭하며, 단향(檀香)이라고 일컫기도 한다. 고대인들이 향나무 근처를 첫 주거지로 삼고, 향나무를 경외(敬畏)한 것은 향나무의 그윽한 향내도 향내지만 사시사철 늘 푸른 특성에 강인한 생명력을 부회시켜 사고(思考)한 데서 비롯된 것이다.
우리 나라 사람들의 향수와 향료 사용사례는 삼국시대에 이르러서야 구체적으로 전해지고 있다. 김유신(金庾信)은 향불을 피워 하늘에 맹세한 뒤에 무술연마를 하였다.
진지왕은 도화녀(桃花女)와 7일간 방에 머무르는 동안 향을 살랐고, 눌지왕은 공주의 질병을 향으로 치료한 일이 있다. 또, 신라인들은 남녀노소가 빈부에 구애됨이 없이 향료를 주머니에 넣어 패용했다고 한다.
삼국시대의 향수·향료 사용은 고고학으로도 입증된다. 고구려의 쌍영총 고분벽화 동쪽 벽에 아홉 사람이 걸어가는 그림이 있는데, 맨 앞에 가는 소녀가 향로를 머리에 이고서 두 손으로 받든 장면이 있다.
그 향로는 밑이 둥글넓적한 그릇처럼 생긴 받침 위에 둥글고 길쭉한 막대꼴의 대가 세워지면서 종발(鍾鉢) 같은 것이 올려진 모양으로, 세 줄기의 향연(香煙)이 피어오르고 있다.
또, 석굴암 안쪽 둥근 벽 둘레에 새겨진 지혜제일 사리불과 신통제일 목련은 손잡이 향로를 들고 있다. 석굴암보다 앞선 비암사사유반가석상(碑巖寺思惟半跏石像)의 받침은 둥근 단지형의 향로이다. 혜공왕이 771년에 완성한 에밀레종에는 연꽃송이 모양의 향로가 새겨져 있다.
이들 그림으로 향료의 형태를 추측할 수 있는데 주로 분말을 굳힌 덩어리향을 향로에 넣었을 것이다. 또, 소형 향유병도 많이 출토되었는데, 이것은 향수를 담던 용기이다. 이로써 삼국시대의 사람들이 향수를 뿌리고, 향료는 향로에 사르거나 주머니에 담아 패용했음을 알 수 있다.
1123년(인종 1)에 고려에 온 서긍(徐兢)의 ≪고려도경 高麗圖經≫에 의하면, 고려 궁중에서 사향(麝香)·독누향(篤耨香)·용뇌향(龍腦香)·전단향(栴檀香)·침수향(沈水香) 등을 사른다고 하였다.
30근의 은제 자모수로(子母獸爐)는 높이 4자, 너비 2자 2치로 큰 짐승이 쭈그리고 앉아 작은 짐승을 움켜쥐는 형상으로 뒤돌아보며 입을 벌리고 있는데, 그 입으로 향을 낸다고 하였다. 또, 향을 끓는 물에 담가 옷에 향기를 쐬도록 한 박산로(博山爐)가 있다고 하였다(향기와 습기가 혼합하여 향연이 흩어지지 않도록 한 것임.).
그는 이어서, 귀부인들은 향유바르기를 좋아하지 않고 비단향낭을 차는데, 여럿일수록 자랑삼는다고 하였다. 이 구절은 향유바르기보다 옷에 향연이 스미도록 하거나 향료뿌리기를 좋아하고 향낭 패용을 더 좋아한 관습을 전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또한, 흰 모시자루를 만들어 향초(香草)를 채우고 베개로 사용했다고 한다.
서긍이 기록한 것 외에도 난초를 삶은 물에 목욕(蘭湯)하거나 향수(방향물질을 혼합)에 목욕함으로써 몸에서 향내가 발산되도록 하였다. 초에 난초기름을 배합함으로써 향내가 방안에 그윽하게 하였다. 일부 사람들은 향을 복용하기도 하였다.
고려가사 <만전춘별사 滿殿春別詞> 가운데에 약든 가슴을 맞춘다는 대목이 있는데 ≪고려사≫에 보이는 ‘만전향(滿殿香)’을 복용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조선시대에는 사향을 복용함으로써 회춘(回春) 혹은 조정(助精) 효과를 기대하였다. 여기서 만전향은 바로 사향이거나, 사향을 배합하여 만든 것으로 추측된다.
고려시대에는 향의 해외교역이 활발하였다. 초기 사례만 보더라도 945년(혜종 2)과 1079년(문종 33)에 향유 50근과 220근을 각기 진나라와 송나라에 수출하였다.
송나라로부터는 1079년에 경주(慶州) 침향(沈香), 광저우(廣州) 목향(木香)·정향(丁香)·곽향(藿香), 서융 안식향(安息香)·용뇌향·사향을 수입한 일이 있다.
이 교역 사실은 고려의 향유 제조기술과 향료에 대한 감각이 뛰어났음을 입증한다. 중국에서 수입된 향은 원료향이며 수출한 것은 가공한 향유이기 때문이다.
고려시대의 애향관습이 거의 그대로 조선시대에 이어져 부부침실에 사향을 사르고, 난향의 촛불을 켜 분위기를 돋우었다. 또, 여자뿐만 아니라 남자들도 향낭을 패용하였다.
독서할 때, 시를 지을 때, 손님을 맞을 때, 차를 마실 때에도 향로에서 향연을 피워올렸다. 향료를 옷에 뿌리고, 머리를 감아 몸을 깨끗하게 하는 훈목(薰沐)이 선비계층에 보편화하였다.
혼례에도 향은 필수였다. 유교식 전통혼례를 삼서육례(三誓六禮)라고도 하는데, 이는 전안청(奠雁廳)에 차린 향로 앞에서 신랑신부가 서약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우리 나라 사람들의 애향관습은 향수와 향료의 제조 및 향로의 발달을 가져왔다. 향로는 청동제 및 도자제품이 있는데 명품들이 적지 않다. 향로를 기능별로 보면 뚜껑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이 있다. 또, 분말을 응고시킨 막대형〔線香〕을 꽂던 향꽂이가 있다.
향낭은 향료를 담은 주머니지만, 이것을 옷고름 혹은 허리춤에 패용함으로써 일찍이 노리개 겸용이 되었다. 재질도 고급화하여 은·은칠보·금사(金絲)·밀화·비취·백옥 따위로 만들고 대부분 정교하게 조각하였다.
우리 나라 사람들이 애용한 향은 주로 난향과 사향이었다. 다른 생활필수품과 마찬가지로 대부분 자가제조하였다. 물론, 고급품은 향제조 전문가인 향장(香匠)이 제조했으나 민가에서도 여자들뿐만 아니라 남자들도 제조하였다.
향수는 향료물질을 압착하거나 기름에 용해시켜 만들었다. 향료는 향료물질을 분말로 만들고, 이것을 다시 혼합하여 응고시키기도 하였다. 선비들이 손쉽게 만들던 방법은 늙은 소나무와 잣나무의 뿌리·가지·잎과 열매를 절구에 찧어 소나무 진에 섞어 응고시키는 것이었다.
우리 나라에 근대개념의 향수가 소개된 것은 개항 이후이다. 1960년대 이후에야 수요가 증가하고 있으나 많지 않은 편이다. 그 까닭은 애향관습에도 불구하고 향내가 약한 자연향에 오래 익숙했기 때문이다.
사향은 향내가 꽤 강한 편이나, 이것을 향낭에 넣을 경우, 얼핏 느끼지 못할 만큼 겹겹이 싸곤 하였다. 또, 기생들이 강한 향내를 발산시킨 탓에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향내가 짙은 인공조합향을 기피하는 경향이 있었다.
한편, 인류가 최초로 발견한 화장료(化粧料)로서 최고(最古)의 화장품이라고 일컫는 향수의 발달과정은 매우 느린 편이었다. 1370년에 헝가리 왕비에 의하여 최초의 알코올 향수라고 할 ‘헝가리워터’가 개발되었다.
1709년에 오데코롱(향수는 알코올에 15∼20% 정도의 향료를 용해시킨 것이고, 오데코롱은 2∼7%의 향료를 용해시킨 것임.)이 제조되고, 19세기에 이르러서 인공향료의 제조가 가능해져 비로소 향수의 양산, 대중화가 이루어졌다.
우리 나라에서는 향수·향료의 사용이 광범위하고 고려시대에 중국에 예물로 보낼 만큼 제조기술이 우수했으나 알코올에 용해시키는 기술만은 서양보다 뒤떨어졌다. 약 2,000년 전의 향료공장이 사해(死海) 부근에서 발굴되었는데, 향료재료의 90%가 동방에서 수입된 것이었다. 동방은 중국 및 우리 나라를 가리키는 것으로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