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는 국이(國耳). 할아버지가 중추부경력(中樞府經歷) 허진(許震)이다. 생원으로 성균관에 들어간 뒤 1615년(광해 7)에 진사 정택뢰(鄭澤雷) 등 19인이 연명으로 소를 올려 이원익(李元翼)의 무죄를 호소할 때 참여하였다.
나아가 인목대비(仁穆大妃)의 폐위 여론이 나도는 가운데 대북파의 이이첨(李爾瞻) 등에게 대항하여 “대비를 폐하면 인심을 잃을 것이니 대비를 구원하여 인심을 얻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 일로 인하여 국문(鞠問: 왕이나 왕의 대행을 받은 관원이 신문을 함.)을 당하고 풀려났으나 1619년(광해 11) 인목대비가 폐위되어 서궁(西宮)에 유폐되자 다시 절도에 위리안치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