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쪽은 광진구, 북쪽은 동대문구, 서쪽은 중구 · 용산구, 남쪽은 한강을 경계로 강남구와 접한다. 위치는 동경 127°00'~127°07', 북위 37°31'~37°33'이다. 면적은 16.86㎢이고, 인구는 29만 7003명(2015년 현재)이다. 행정구역으로는 17개 행정동(17개 법정동)이 있으며, 구청은 서울특별시 성동구 행당동에 있다.
대부분의 지역이 100m 이하의 저지대를 이룬다. 중앙지역은 청계천과 중랑천이 합류하여 한강으로 흘러드는 지역으로 범람원에 해당하는 하천퇴적지형이다. 이 지역에는 남산 줄기로 중구 신당동, 용산구 한남동, 성동구 옥수동의 경계를 이루는 응봉산(鷹峰山)을 비롯하여 대현산 · 금호산 · 매봉산 등이 있으나 산 정상 부근까지 주택지가 개발되고 도로도 개설되어 산으로서의 천이가 중단되었다.
서울을 서에서 동으로 관통하는 청계천과 의정부에서 한강으로 흐르는 중랑천이 이 지역에서 합류하여 한강으로 흘러 들어간다. 한강 연안에 위치하고 있어 편서풍대의 영향을 받아 연평균 기온은 13.3°C, 1월 평균기온은 -1.5°C, 8월 평균기온은 26.1°C이며, 연 강수량은 1,499㎜ 내외이다.
한강을 오르내리는 내륙수로(內陸水路)의 기항지였던 옥수동의 응봉 기슭은 일찍이 빗살무늬토기의 산포지로 밝혀져 신석기시대에 우리 조상이 살고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1930년에는 서기전 700년경의 돌도끼 · 돌칼 · 오석(烏石)과 옥수석기(玉髓石器) · 채색토기(彩色土器) 등 청동기시대 주거지와 유물이 혼합된 유적지가 발견되었다. 이것은 이 지역이 신석기시대 이래 청동기시대까지 인류의 생활터전이었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고대국가로서 마한이 이 일대를 장악하고 있었으나 서기전 18년 부여계 고구려 유이민인 온조(溫祚)가 남하하여 한강 유역에 백제국(伯濟國)을 건국하고 점차 마한제국을 병합하여 삼국 중 하나인 백제로 성장하였다. 백제는 한강 유역을 차지한 후 475년 고구려의 남하로 수도를 공주로 옮길 때까지 500여 년간 이 일대를 지배하였다. 한강 유역은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위치였기 때문에 고구려 · 백제 · 신라 3국의 쟁패가 계속 이어졌다.
고구려는 광개토대왕 때 남하정책을 펴면서 한강 유역을 공략하여 석현성과 관미성 등 10여 성을 함락하고 이어 백제의 서해안을 공격하여 58개 성을 취하였다. 이어 장수왕 때는 백제의 한성을 공격하여 개로왕을 살해함으로써 백제를 한강 유역에서 완전히 몰아내고 장악하였고, 이 일대에 북한산군(北漢山郡)을 설치하여 80여 년간 다스렸다.
신라는 백제와 동맹을 체결하여 한강 유역을 차지한 후 동맹을 파기하고 이 일대를 독차지하여 북한산주(北漢山州) 혹은 신주(新州)를 두어 관리하였다. 한강 유역을 차지한 신라는 당나라와 직접적인 교섭을 통해 고구려 · 백제에 대항하였다. 그리하여 동아시아에서는 고구려와 백제를 잇는 수직라인과 신라와 당을 연결하는 수평라인이 서로 대립되었고, 당나라 세력을 이용한 신라는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삼국을 통일하게 되었다. 통일을 달성한 신라는 전국을 9주로 나누면서 한강 유역을 한산주(漢山州) 또는 한주(漢州)로 개칭하고 한강과 접하고 있는 서울 지역에는 따로 한양군을 두었다. 이로 인해 ‘성동구’는 한산주의 한양군에 속하게 된다.
후삼국시대 ‘성동 지역’은 양길의 부하였던 궁예(弓裔)가 895년 한산주 관내의 10여 성을 복속시킴에 따라 궁예의 휘하에 들어갔다가 왕건(王建)이 건국한 고려에 귀속되었다. 고려 건국 초기에는 각 지역에 호족세력들이 건재하였는데 한강 유역 일대에는 왕규(王規)의 세력이 가장 강대하였고, 강감찬(姜邯贊)의 후손인 금주강씨(衿州姜氏 혹은 衿川姜氏) 세력과 풍덕유씨(豊德柳氏) 세력 등이 존재하고 있었다. 왕규는 경기도 광주 일대를 중심으로 하고 있었고, 금주강씨는 금천구 일대에서 활동하였으며, 풍덕유씨 세력들은 한강 하류의 마포 서쪽지역 일대에 웅거하고 있었다.
이 일대의 지명은 고려 초에는 양주(이때의 양주는 지금의 양주군이 아니라 고려 초 서울의 이름이다), 문종 이후 충렬왕 때까지는 남경(南京), 충선왕 이후 고려 말까지는 한양부(漢陽府)라 불리었다. 983년(성종 2) 전국에 12목을 설치하여 지방통치체제를 정비할 때 양주목에 속하였고, 1018년(현종 9)에는 지주사(知州事)로 격하되어 광주목(廣州牧)의 관내에 예속되었다. 이어 1067년(문종 21)에 한강 북부지역에 남경을 설치하면서 서경(西京) · 동경(東京)과 함께 삼경체제의 중심에 서게 되었다.
양주가 남경으로 승격된 것은 서울의 역사에서 획기적인 사건으로, 주로 연기사상(延基思想)이라는 일종의 풍수지리적 쇠왕설(衰旺說)을 배경으로 시행된 것이다. 이 때 남경의 범위는 동으로 대봉(大峰: 지금의 낙산), 서로 기봉(岐峰: 지금의 안산), 북으로 면악(面嶽: 지금의 북악산), 남으로 사리(沙里: 지금의 용산)에 이르렀다.
1068년에는 남경이궁(南京離宮)을 설치하고, 남경으로의 천도론이 제기되어 1101년(숙종 6) 9월 남경개창도감을 설치하여 본격적인 남경 궁궐 후보지를 물색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1104년(숙종 9)에 지금의 청와대 부근에 새 궁궐이 낙성되어 왕이 친행해 점검하는 등 거의 천도가 실현될 단계까지 이르렀으나, 이듬해 왕이 죽자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 뒤 무인정권과 몽고침략 등의 정치적 · 군사적 시련을 겪는 사이에 남경은 서경과 함께 국왕 순주(巡駐)의 이경(離京)으로서의 가치가 감소되어 1308년(충렬왕 34)에 한양부(漢陽府)로 개칭되었고, 유수를 윤으로 고치는 것 외에도 판관과 사록 등의 관직을 두었는데 이는 그 지위가 격하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1325년 8월 충숙왕은 왕비인 조국장공주(曺國長公主)와 함께 한양에 행차하여 용산의 높은 언덕에 올라 한강이 바라다 보이는 곳에 장막을 치고 행궁(行宮)으로 삼아 머물기도 하였다. 공민왕 때 이르러 원과의 관계를 끊고 과거의 폐정을 혁신함과 동시에 새로 도읍을 옮길 것을 계획했는데, 이때 천도의 유력한 후보지로 과거의 남경인 한양이 물망에 올랐다. 그 뒤 왜구의 침략으로 조운이 원활하지 않자 개경에까지 영향이 미쳤고 곧이어 수도의 안보문제가 거론되자 또다시 한양천도론이 고개를 들었다.
그리하여 우왕 때는 한양천도가 본격적으로 논의되고 추진되어 한때 실현되었고, 공양왕 때에도 일시 한양천도가 있었다. 그러나 다시 개경으로 환도했다가 신왕조인 조선의 개창을 계기로 천도문제는 마침내 최종적인 결정을 보게 되었다.
고려 말부터 대두되던 한양 천도론은 조선이 개창되면서 본격적으로 논의되었다. 개경에 정치적 기반이 없었던 태조 이성계는 새로운 기반을 마련하기 위해 신도읍이 필요했고, 이러한 요건을 갖추고 있었던 곳이 바로 한양이었다. 여러 지역이 도읍 후보지로 거론되었으나 태조는 이들 지역을 직접 답사하기도 하고 신하들을 보내 정밀 조사하도록 한 후 다양한 논의를 거쳐 태조 3년(1394) 8월 24일 한양을 새로운 도읍지로 확정하였다. 이어 9월 1일 궁궐 건설의 실무를 담당 추진하기 위한 기관인 신도궁궐조성도감(新都宮闕造成都監)을 설치하여 박차를 가하였다. 9월 9일에는 한양에 대한 도시계획의 일환으로 궁궐 · 종묘 · 사직과 도로의 건설, 각종 관아의 배치 등 기본계획을 작성하도록 지시하였다. 이때 만들어진 도시계획안이 조선시대 500여 년간의 수도 서울을 지탱하여 갔다.
수도 건설을 위한 궁궐 공사가 진행되는 가운데 태조는 하루라도 빨리 개경을 떠나 새로운 도읍지로 옮기고자 하는 열망에 궁궐 공사가 시작된 한 달 후인 태조 3년 10월 25일 천도를 단행하여 3일 후인 10월 28일 한양에 도착하였다. 이어 이듬해 12월에 조선시대 정궁(正宮)인 경복궁이 완공되어 비로소 궁에 들어갈 수 있었다. 이후 한양부(漢陽府)를 한성부(漢城府)라 고치고 이듬해 9월에는 도성과 문루를 완성하였다. 그리고 한성부의 행정구역을 동 · 서 · 남 · 북 · 중 5부(部) 52방(坊)으로 나누어 도시 규모를 정비하였다. 이로써 명실상부한 조선의 수도로서 한성이 탄생된 것이다.
성동구 일대는 조선시대 한성부 성저십리(城底十里) 이내의 지역으로 한성부 동부의 인창방(仁昌坊)과 남부의 두모방(豆毛坊)에 속하였다. 이 당시 두모방에는 두모포계(豆毛浦契) · 신당리계(神堂里契) · 전관일계(箭串一契) · 전관이계(箭串二契) · 신촌리계(新村里契) · 수철리계(水鐵里契) · 중촌리계(中村里契)가 있었으며, 용산방에는 마장리계(馬場里契) · 답십리계(踏十里契) · 왕십리계(往十里契)가 있었다.
이 지역은 한강을 접하고 있어 교통이 편리하여 일찍부터 물류의 중심지로 부상하였다. 조선시대는 두모포가 한강 상류로부터 내려오는 각종 물산과 목재 등이 모이는 장소였으며, 일본에서 오는 사신들도 두모포에서 배를 내려 광희문을 통해 동평관(東平館)으로 들어가곤 하였다.
또한 이 지역은 도성의 동쪽 교외에 해당하며, 응봉을 중심으로 국왕의 사냥터로서 주목을 끌던 곳이었다. 이른바 살곶이벌로 응봉 기슭에는 매 사냥을 관장하는 응방(鷹坊)이라는 관청을 두기도 하였다. 뿐만 아니라 조선시대에 말을 기르는 목장이 이 지역에 있었으며, 조선 전기에는 군사들의 열무장으로도 사용되던 곳이었다. 옥수동에는 조선시대 전문관료를 양성하는 독서당(讀書堂)이 있었으며, 한강에서 겨울에 얼음을 채취하여 저장하던 동빙고(東氷庫)가 있었다.
1911년 4월 1일 5부 8면제가 실시됨에 따라 이 지역은 경성부의 인창면(仁昌面)과 두모면(豆毛面)에 속했으며, 1913년 인창면 일부가 경성부 동부에 편입되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경성부의 5부 8면제를 폐지하고 경성부를 축소시킬 때 인창면이 폐지되었고, 이 일대는 경기도 고양군 뚝도면(纛島面)과 한지면(漢芝面)에 편입되었다. 그 뒤 1936년 고양군 한지면 내 9개 리가 경성부에 재편입되면서 동부출장소에 소속되었으며, 1943년에는 구제(區制)가 실시되면서 성동구가 신설되었다.
1946년 경성부가 서울시로 되고, 1949년 서울특별시로 승격되면서 서울시 확장에 따라 뚝도면을 편입해 뚝도출장소를 두었다. 1963년에는 경기도 광주군의 4개 면인 구천면(九川面) · 중대면(中垈面) · 대왕면(大旺面) · 언주면(彦州面)이 성동구에 편입되었고, 천호 · 송파 · 언주출장소를 설치하였다. 이후 1973년 송파 · 언주출장소를 폐지하고, 천호 · 영동출장소를 설치했으며, 영등포구 잠원동과 서초동, 양재동이 성동구로 편입되었다. 그리고 성동구 중곡동 일부가 동대문구 면목동으로, 동대문구 면목동 일부가 성동구 중곡동에 편입되는 등 구역 조정이 이루어졌다. 1975년에는 강남구가 분구됨에 따라 성동구 관할하에 있던 한강 이남의 영동 · 천호출장소가 성동구에서 분리, 강남구로 편입되었다. 또한 성동구 관할의 신당동 상왕십리 일부가 중구로, 성동구 옥수동 일부가 용산구로, 성동구 중곡동과 장안동 일부가 동대문구로, 동대문구 답십리 제4동과 용두동 · 장안동 일부를 합하여 용답동이 신설되면서 성동구로 편입되는 등 행정구역 조정이 이루어졌다. 이후 1977년에는 강남구 신천동 일부를 성동구 구의동에 편입했고, 1995년에는 동일로를 경계로 성동구에서 광진구가 분구됨에 따라 성동구 20개 동, 광진구 16개 동으로 분구되었다.
역사적인 문화유적으로는 중랑천과 청계천이 만나는 지점 아래쪽에 보물로 지정된 서울 살곶이 다리(보물, 2011년 지정)가 있고, 용답동에 개인이 소장하고 있는 박만정 해서암행일기(보물, 1973년 지정)가 있다. 그리고 성수동1가에 1989년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현, 유형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뚝도수원지 제1정수장이 있는데, 정수장의 송수실 1동(연면적 312.4㎡)과 완속여과지 1개소(연면적 4,433㎡)가 지정 대상이다.
이 외에는 옥수동에 동빙고 터와 독서당 터가 남아 있으며, 한강에서 경치가 좋기로 이름났던 두모포(동호대교 북단)도 예로부터 전국의 물산이 모이는 곳으로 유명한 유적지이다. 옥수동에는 두뭇개 승방인 미타사(彌陀寺)가 있고, 하왕십리동에는 안정사(安定寺, 安靜寺)가 있다. 888년 신라 때 창건되었다고 전해지는 미타사는 비구니사찰이며, 이승만 대통령이 자주 다녔다고 전한다. 827년(흥덕왕 2) 신라 때 창건되었다고 전해지는 안정사는 조선 초 무학대사가 중창한 사찰로서 1923년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던졌던 김상옥 의사가 도피하여 일시 은거했던 장소이기도 하다.
금호동2가에 있는 소목장은 김창식이 보유자이며, 2001년 10월 23일 지정되었다. 행당1동에 행당동 아기씨당굿은 행당동 아기씨당굿보존회가 보유자이며, 2005년 1월 15일 지정되었다. 소목장은 2001년, 아기씨당굿은 2005년 서울특별시 무형문화재(현, 무형유산)로 지정되었다.
이 지역은 일찍부터 근대교육기관이 있었다. 초등학교로는 성수동1가에 있는 경동초등학교가 1913년 설립되어 가장 오래된 학교이고, 왕십리동의 무학초등학교가 1915년에 설립되었다. 중학교로는 응봉동의 광희중학교가 1937년 설립되어 제일 역사가 깊으며, 고등학교로는 행당동에 위치한 덕수정보산업고등학교가 1910년 설립되어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상업고등학교로 자리매김하였고, 무학여자고등학교가 1940년 설립되었다. 나머지 중학교와 고등학교 및 대학교는 모두 해방 이후에 건립된 학교들이다. 대학으로는 행당동에 위치한 한양여자대학과 한양대학교가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20개교, 중학교 11개교, 고등학교 7개교가 있으며 대학은 2개교가 있다.
이 지역의 문화공간은 영화관, 박물관, 전시관이 있으며, 문화시설로는 구민회관, 문화원, 청소년수련시설과 구민체육시설이 있다.
박물관으로는 한양대학교박물관이 있다. 1979년에 개관한 한양대학교박물관은 총 1만여 점의 유물을 소장하고 있으며, 20여 년간 이성산성 등 학술조사를 통해 발굴한 유물 3,500여 점을 비롯해 무형유산 전승자의 제작도구 500여 점, 조선시대 서화류와 도자기류 등을 전시하고 있다. 전시관으로 마장동에 위치한 청계천문화관은 청계천복원사업을 기념하여 만들어진 것으로서 청계천의 역사와 문화 및 광복 이후 청계천의 모습들, 청계천 복원과정 등을 담은 자료들을 전시하고 있는 공간이다.
행당동에 있는 성동문화회관은 지하 1층, 지상 4층 규모로 1989년 개관하여 대강당과 여성대학, 어린이집 등의 시설을 갖추고 있다. 대강당에서는 1991년 창단된 성동구 어머니 합창단이 건전가요와 가곡을 대상으로 각종 경연대회에 참가하는 등의 문화 활동을 하고 있다. 행당동에 있는 성동구립문화정보센터는 1999년 개관하여 이 지역의 중심 도서관으로서 역할을 하고 있으며, 영화관으로는 동부시네마 1곳과 청계천 하류의 자동차전용극장 1곳이 있고, 행당동에 있는 성동문화원은 1997년 개관하였다. 기타 서울시민안전체험관이 있고, 6호선 녹사평역에는 상설 전시공간이 마련되어 있어 시민 누구나 자유롭게 작품을 전시할 수 있다.
성동구도시관리공단에서 관리하고 있는 체육시설로 성동구민종합체육센터, 마장국민체육센터, 열린금호교육문화관 등이 있다. 성동구민종합체육센터는 수영장과 에어로빅 헬스장을 갖추고 있으며, 농구 · 태권도 · 검도 등을 즐길 수 있는 생활스포츠 공간도 있어 많은 사람들이 즐겨 찾는 곳이다. 행당동에 위치한 마장국민체육센터는 지하 2층, 지상 3층의 규모로 수영장 헬스장은 물론 대강당과 체육관에서 생활스포츠를 즐길 수 있는 시설을 갖추어 놓았다. 그리고 금호동의 열린금호교육문화관에서는 수영과 헬스 및 에어로빅을 즐길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하고, 농구 · 탁구 · 태권도 등 생활스포츠와 댄스 등 문화스포츠를 교육하기도 한다. 이 외에 옥수동, 응봉동의 달맞이근린공원이나 응봉근린공원 등지에 배드민턴장이나 체력단련장을 마련하여 운동 동호인을 위한 체육시설을 만들어 놓았고, 특히 응봉동의 암벽등반공원에는 경기용과 연습용을 위한 암벽등반 시설을 설치하여 암벽타기를 즐기는 초보자는 물론 전문가들도 자주 찾는 곳이다.
정월 초하루에는 설날을 맞아 각 가정에서 차례를 지내고 세배를 드리는 풍속이 남아있다. 정월 열나흘에는 오곡밥 먹기, 정월 대보름의 부럼깨기와 더위팔기, 윷놀이, 연날리기 등이 행해진다. 사월 초파일에는 절에 가서 연등달기, 칠월 복중에 개고기와 삼계탕 먹기, 추석 차례와 성묘가기, 동지 때 팥죽 먹기 등의 세시풍속이 펼쳐진다.
특히 옥수동 미타사와 현대아파트가 있는 뒷산인 달맞이봉은 예로부터 정월 대보름에 주민들이 이곳에 올라가 달을 맞이하였다하여 붙여진 이름이기도 한다.
이 지역에는 사근동(沙斤洞) · 응봉동(鷹峰洞) · 행당동(杏堂洞)에 동제(洞祭)가 전해오고 있다. 사근동에는 남이장군(南怡將軍)의 사당이 있어 매년 음력 10월 사근동 번영회 주관으로 마을 사람들이 모여 제사를 지내고 있다. 응봉동의 부군당(府君堂)에서는 마을의 안녕과 번영을 목적으로 신송회라는 친목단체 주관하에 매년 10월에 제를 올린다. 행당동의 아기씨당은 아기씨를 주신으로 하고 무속화를 걸어 놓았으며 매년 4월경에 굿을 한다.
이 지역에는 조선시대 무학대사가 도읍지를 찾는 과정에서 왕십리(往十里)의 지명 유래가 된 이야기와 살곶이벌에 얽힌 이야기, 행당동아기씨당 이야기, 성수동 회나무에 읽힌 이야기 등이 전하고 있다.
살곶이벌과 관련된 이야기는 조선 건국시기로 올라간다. 태조 이성계는 그의 사랑하는 아들인 방석과 방번 형제를 죽이고 왕위에 오른 태종을 미워하며 함흥으로 가서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태종은 왕위에 오른 후 아버지로부터 정당성을 얻기 위해 여러 차례 신하를 보내 함흥에서 돌아오실 것을 요구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러던 중 박순(朴淳)이 새끼 뗀 어미 말을 끌고 가서 간청한 끝에 이성계가 감동하여 서울로 돌아오게 되었다. 이때 태종은 아버지를 맞이하기 위해 이곳에 차일을 치고 굵고 높은 기둥을 세워 놓았다. 이곳에 도착한 태조 이성계는 아들을 보자 바로 화살을 쏘았고, 태종은 기둥 뒤로 급히 피하여 화를 면하였는데 태조가 웃으면서 “천명이로다.” 하고 왕권을 인정하였다고 한다. 이때 화살이 날아와 꽂힌 지역이라 하여 이후부터 살곶이벌이라고 불렀다고 전한다.
토지의 1.6%가 임야이고 경지는 전체 토지의 1.2%이다. 대지 37.2%, 하천 22.4%, 학교용지 5.4%, 도로 13.4%, 공장용지 2.8%, 철도용지 1.7%로 전체 토지에서 대지가 차지하는 비중이 가장 높다.
산업 인구 가운데 제조업 종사자는 33.2%, 건설업 2.7%, 도소매업이 16.9%, 숙박 및 음식업이 8.3%, 운수업 6.9%, 금융 및 보험업 2.1%, 부동산 및 임대업 3.0%, 사업서비스업 4.8%, 교육서비스업이 6.8% 등의 분포를 보이고 있다. 전체 사업체수 가운데 1~4명의 종사자를 가지고 있는 사업체가 전체의 82.7%로 압도적 위치를 차지하고 1,000명 이상의 사업체는 3개에 불과하다.
예로부터 한강을 끼고 있어 수운을 통해 두모포로 쉽게 접근하였기 때문에 일찍부터 교통의 요지로 발전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조선시대 한양에서 중남부로 이동할 때는 성동구에 위치한 살곶이다리를 건너 갔으며, 일제 때는 용산과 함흥을 잇는 경원선이 왕십리역을 통과하기도 하였다.
현대에 들어서 서울 강북의 도심과 한강 이남지역을 연결하는 동호대교와 성수대교가 가설되면서, 성동구 지역은 서울 동남부 지역과 연결되는 주요한 지점으로 부상되었다. 나아가 지하철시대가 개막되면서 도심 순환선인 2호선과 동서를 연결하는 3호선 및 5호선이 모두 성동 지역을 지나고, 경원선 철도가 통과하면서 더욱 교통이 편리해졌다.
성동구의 주요 간선도로는 응봉로와 왕십리길이 중심도로이며 동서와 남북으로 비교적 잘 발달되어 있다. 도로의 크기에 따라 광로(廣路) · 중로(中路) · 소로(小路)를 모두 합하면 총연장은 406㎞에 달하며, 도로 포장률은 100%이다. 폭 40m 이상의 넓은 도로는 강변북로와 동부간선도로를 비롯하여 응봉로와 왕십리길이 있으며 이를 연결하는 간선도로로 금호동길, 맛봉길, 마장길, 독서당길, 사근동길, 광나룻길, 구의로, 살곶이길, 성삼길, 뚝섬길 등이 있다.
지하철 2호선은 서울 강남과 강북의 도심권 43개 역을 순환하는 노선으로 1978년 3월에 착공하여 1984년 5월 완공되었다. 성동구를 지나는 2호선 구간은 상왕십리역 · 왕십리역 · 한양대역 · 뚝섬역 · 성수역이며 왕십리역에서 5호선과 경원선을 갈아탈 수 있고, 성수역에서는 신설동과 연결되는 지선을 갈아탈 수 있다. 지하철 3호선은 오금에서 대화까지 44개의 역을 운행하는 전철로, 1980년 착공하여 1985년 구파발역독립문역 구간이 처음 개통하였고, 1985년 독립문역양재역, 1990년 지축역구파발역, 1993년 양재역수서역 구간이 개통하였다. 2010년에는 수서~오금간 구간이 개통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으며, 성동구를 지나는 3호선 구간에는 옥수역 · 금호역이 있다. 지하철 5호선은 마천역과 상일동역에서 각각 출발하여 강동역에서 만나 방화역까지 50개 역을 운행하는 전철로 1990년 착공하여 부분적으로 개통을 시작하여 1996년에 완전 개통되었으며, 성동구를 지나는 5호선 구간은 마장역 · 왕십리역 · 행당역 · 신금호역이 있고, 왕십리역에서 2호선과 경원선을 갈아탈 수 있다. 서울특별시 성동구와 경기도 수원시 팔달구를 잇는 분당선은 1994년부터 부분적으로 개통을 시작하였으며, 왕십리역 · 서울숲역이 성동구 내를 지나고 있다.
뚝섬은 생성과 변천을 거듭해 오면서 임금의 사냥터, 군검열장 등으로, 최초의 상수원 수원지, 골프장, 경마장으로 변화를 거듭하였다. 서울숲 조성 이전에는 체육공원으로 활용되어 왔으며, 2005년 6월 18일 환경친화적 대규모의 숲으로, 시민의 삶이 어우러진 서울에서 최고의 휴식처로 다시 태어났다. 35만 평 규모의 생태공간으로 조성된 서울숲은 크게 문화예술공원, 생태숲, 자연체험학습원, 습지생태원, 한강수변공원 등 5개 테마구역으로 나눠져 있다.
서울숲 입구 분수대를 지나 가장 먼저 만나는 ‘문화예술공원’이 서울숲의 중심축이다. 이곳에는 서울숲 광장과 야외무대, 숲속놀이터, 물놀이터, 스케이트파크 등이 들어서 있어 가족단위로 휴식할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한다. 4만 5000평 규모의 생태숲은 과거 한강물이 흘렀던 곳으로, 서울 근교의 자연 생태숲을 재현해 야생동물이 서식할 수 있는 공간으로 조성됐으며, 8종 90여 마리의 야생동물이 방사되어 시민들은 생태숲을 가로지른 보행 육교 위에서 야생동물을 관찰할 수 있다. 생태숲에 방사된 동물들은 꽃사슴 21마리, 고라니 10마리, 다람쥐 30마리, 다마사슴 5마리이며, 생태숲 내 연못에는 원앙 6마리, 청둥오리 8마리, 흰뺨검둥오리 8마리, 쇠물닭 4마리가 유유히 노닐고 있다. 이 밖에도 자연체험학습원, 습지생태원, 한강수변공원 등에서 다양한 생태환경을 골고루 체험할 수 있다
중랑천과 합류되는 청계천이 복원되면서 하류 지역에 해당하는 성동구에 청계천문화관을 설립함에 따라 이곳을 찾는 시민의 발길이 이어지고, 응봉근린공원이나 무학봉공원 등 5개의 근린공원과 41개소의 어린이공원 등이 있다. 특히 1999년 12월 18일 개장한 응봉산 암벽등반공원은 채석 후 방치되어 왔던 응봉산 절개지에 대한산악연맹 암벽등반경기위원회의 자문과 검증을 거친 인공암벽을 설치하여 암벽등반을 즐길 수 있도록 꾸민 테마공원이다. 기존의 평면형 암벽구조에 패널 전면을 이용한 입체구조라는 새로운 개념을 도입하였으며, 암벽등반대회 뿐 아니라 등반교실도 열려 사회체육으로서 암벽등반 활성화의 요람이 되고 있다.
매월 마지막 주 토요일, 서울숲에서는 서울숲 북(book) 벼룩시장 행사가 열린다. 서울숲 북 벼룩시장은 시민들 누구나 낡고 정든 헌 책, 새 것이지만 더 이상 읽지 않는 책, 내가 읽고 감동받아 다른 사람들에게 소개하고 싶은 책들, 책장에 간직해 놓았던 내 어린시절 책들을 가지고 나와 소개, 판매할 수 있고, 필요한 책을 교환하거나 기증할 수도 있다. 이 행사는 2006년 6월 17일 숲속 작은 도서관 개관과 함께 시작하여 출판사, 개인, 관련단체, 자원봉사자들이 도움을 준 결과 정기적인 문화행사로 자리 잡았다.
서울시 상수도사업본부에서는 아리수 인지도 확산 및 이미지 제고를 위해 성수동2가의 서울숲에서 아리수 페스티벌을 개최한다. 서울시의 수돗물 최초 통수일(1908.9.1)을 문화행사의 장으로 마련하여 시민과 상수도인이 함께 어우러지는 한마당 축제의 장으로 구성하여, 보고, 느끼고, 체험하는 문화행사로 정착시켜 나가고 있다. 아리수 체험관을 설치하고, 가수 및 오프닝 공연 등이 펼쳐진다.
성동구의 동서부에 위치한 동이다. 금호동의 옛 이름은 수철리(水鐵里)이며, 금호동(金湖洞)의 ‘금’(金)은 수철리의 ‘철’(鐵)에서, ‘호’(湖)는 ‘수’(水)에서 인용하여 금호동이라 하였다. 조선시대 한성부 남부 두모방(豆毛坊, 城外) 수철리계(水鐵里契)였으며, 1911년 경성부 두모면 수철리라 하였다. 1914년 경기도 고양군 한지면 수철리라 하였고, 1936년 경성부 금호정(金湖町)이 되었다. 광복 후 1946년 성동구 금호동이 되었고, 1964년 금호동은 금호동1가 ·2가 ·3가 ·4가의 4개 법정동으로 분동되었고, 행정은 금호1가동에서 금호4가동까지 모두 4개의 동사무소가 있다. 위치는 동쪽에 행당동 · 응봉동, 서쪽에 중구, 북쪽에 하왕십리동, 남쪽에 옥수동이 접해 있다. 동쪽에 남북으로 연결되는 동호로가 동호대교와 연계되고, 지하철 3호선이 지나고 있어 교통이 편리하다.
성동구의 서북부에 위치한 동이다. 이 지역의 행정업무를 담당하고 있는 도선동사무소는 홍익동의 행정도 겸하고 있다. 동명의 유래는 통일신라의 도선대사(道詵大師)가 무학봉(舞鶴峰)에서 수도하여 도선대사의 이름을 따서 붙였다는 설, 조선 초에 무학대사가 도읍지를 물색할 때 왕십리에서 만난 노인이 현령(顯靈)한 도선국사라 생각하여 도선동이라고 했다는 설이 있다. 조선시대 한성부 동부 인창방(仁昌坊, 城外) 왕십리(往十里)에 속하였고, 1911년 경기도 고양군 한지면에 속하였다. 1914년 고양군 한지면 하왕십리였다가, 1936년 경성부 하왕십리정(下往十里町)이 되었다. 1946년 성동구 하왕십리동으로 바꾸었고, 1963년 하왕십리동에서 분동되어 도선동이라 하였다. 위치는 동쪽에 마장동, 서북쪽에 상왕십리동, 남쪽에 하왕십리 · 행당동이 접하고 있다.
성동구의 북부에 위치한 동이다. 동명은 조선 초기부터 말을 기르던 양마장(養馬場)이 이곳에 있어 유래되었다. 조선시대 한성부 동부 인창방(仁昌坊, 城外) 마장리계(馬場里契)에 속하였고, 1895년 한성부 동서(東署) 인창방 동소문외계 마장리라 하였으며, 1911년 경성부 인창면 마장리라 하였다. 1914년에는 경기도 고양군 한지면 마장리라 하고 1936년 경성부 마장정(馬場町)이 되었다. 1946년에 성동구 마장동이 되었다. 위치는 동쪽에 용답동, 서쪽에 도선동, 북쪽에 청계천, 남쪽에 행당동 · 사근동이 접해 있다. 문화시설로는 성동종합사회복지관과 청계천을 복원한 이후 청계천문화관이 들어섰고, 성동구청별관과 대한적십자서울지사 등의 행정기관이 있다. 이곳의 마장축산물시장과 서울축산물총판매장은 널리 알려져 있다.
성동구의 북부에 위치한 동이다. 동명은 이 마을에 사근절[沙斤寺]이 있었던 데서 유래하였다. 조선시대 한성부 동부 인창방(仁昌坊, 城外)에 속하였고, 1895년 한성부 동서 인창방 사근리라 하였으며, 1911년 경성부 인창면 사근리라 하였다. 1914년에는 경기도 고양군 한지면 사근리라 하고 1936년 경성부 사근정(沙斤町)이 되었다. 1946년 성동구 사근동이 되었다. 위치는 동쪽과 북쪽으로 용답동, 서쪽에 마장동 · 행당동, 남쪽에 성수동1가와 접해 있다. 문화시설로는 한양대학교박물관이 있고 전통제례로 남이장군 사당에서 동제를 올리고 있다.
성동구의 서북부에 위치한 동이다. 동명은 조선 초 무학대사(無學大師)가 도읍을 정할 때 이곳에서 노인을 만나 십리를 더 가라는 말을 듣고 도읍을 정했다는 설에 따라 만들어졌다는 것과 도성으로부터 10리 떨어진 거리에 있었기 때문에 답십리(踏十里)와 같이 왕십리(往十里)라는 동명이 생겨났다는 설이 있다. 조선시대 한성부 동부 인창방(仁昌坊, 城外)에 속하였고, 1895년 한성부 동서 인창방 왕십리계였으며, 1911년 경성부 인창면에 속하였다. 1914년에는 경기도 고양군 한지면 상왕십리가 되었고, 1936년 경성부 상왕십리정으로 바뀐 뒤 1946년에 성동구 상왕십리동이 되었다. 위치는 동쪽에 도선동, 서쪽에 중구, 북쪽에 청계천, 남쪽에 하왕십리동이 접해 있다.
성동구의 서북부에 위치한 동으로 동명에 대한 두 가지 설은 상왕십리동과 같다. 조선시대 한성부 동부 인창방(仁昌坊, 城外)에 속하였고, 1895년 한성부 동서 인창방 왕십리계였으며, 1911년 경성부 인창면에 속하였다. 1914년에는 경기도 고양군 한지면 하왕십리가 되었고, 1936년 경성부 하왕십리정으로 바뀐 뒤 1946년 성동구 하왕십리동이 되었다. 위치는 동쪽에 도선동, 서쪽에 중구, 북쪽에 상왕십리동과 청계천, 남쪽에 행당동이 접해 있다. 전통사찰로는 신라 때 창건되었다고 알려진 안정사(安靜寺)가 있고, 중앙교육진흥연구소와 무학초등학교가 있다.
성동구의 남동부에 위치한 동이다. 동명은 조선시대 임금이 말 기르는 것과 군대의 훈련을 사열하던 성덕정(聖德亭)의 ‘성’(聖)자와 624번지 일대 뚝섬수원지(纛島水源池)의 ‘수’(水)자를 따서 붙인 데서 유래되었다. 조선시대 한성부 남부 두모방 전관일계(箭串一契)와 전관이계 전관동(箭串洞)이었으며, 1911년 경성부 두모면 뚝도일계(纛島一契)와 뚝도이계에 속하였다. 1914년 경기도 고양군 뚝도면 서뚝도리와 동뚝도리라 하였고, 1949년에 성동구에 편입되어 뚝도출장소에서 행정을 담당하였다. 이후 1950년에 성동구 성수동1가와 성수동2가의 법정동으로 분리되었다. 성수동1가는 뚝도2계 지역인 서뚝도리, 성수동2가는 뚝도1계인 동뚝도리 지역이었다. 위치는 동쪽에 광진구, 서쪽에 중랑천, 북쪽에 송정동 · 사근동 · 용답동, 남쪽에 한강이 접해 있다. 문화시설로 2005년 서울숲이 조성되어 문화예술공원이 있으며, 성수2가 제2동에는 삼성문화인쇄 등 인쇄관련 업체들과 기계 섬유 등 중소업체들이 밀집되어 있다. 행정동사무소는 성수1가 제1동과 제2동, 성수2가 제1동과 제2동의 4개 동이 있다.
성동구의 동부에 위치한 동이다. 동명은 정확한 유래는 알 수 없으며 조선시대 경기도 양주군(楊州郡) 고양주면(古楊州面)에 속하였다가 1895년 한성부 남서(南署) 두모방 전관계(箭串契) 장내능동(場內陵洞)이라 하였다. 1911년 경성부 두모면 장내능동이 되었고, 1914년 경기도 고양군 뚝도면(纛島面) 송정리(松亭里)라 하였다. 1949년 서울시 성동구에 편입되어 1950년 송정동이 되었다. 위치는 동쪽에 광진구, 서쪽에 중랑천, 북쪽에 용답동, 남쪽에 성수동2가가 접해 있다. 이 지역에는 군자지하철차량기지와 중랑하수처리장, 서울차량정비사업소, 한국전력공사군자변전소, 서울지하철교육원 등이 자리 잡고 있다.
성동구의 서남부에 위치한 동이다. 동명은 ‘옥정수’(玉井水)라는 유명한 우물이 있었으므로 ‘옥정숫골’로 불리었는데, 한자로 쓰면서 옥수동으로 되었다. 조선시대 한성부 남부 두모방 두모포계(豆毛浦契)에 속하였다. 1895년에는 한성부 남서 두모방 두모포계 두모동이라 하였고, 1911년 경성부 두모면 두모리에 속하였다. 1914년에 경기도 고양군 한지면 두모리였고, 1936년 경성부 옥수정(玉水町)이 되었다. 광복 후 1946년에 성동구 옥수동이 되었다. 위치는 동남쪽에 한강, 서쪽에 중구, 북쪽에 금호동4가가 접해 있다. 문화유산으로는 조선시대 얼음을 저장해 두었던 동빙고터와 학자들이 공부하던 독서당터가 있고, 한강가의 두모포도 물산이 모이던 곳이다. 전통 사찰로는 비구니사찰인 미타사가 있다. 동쪽에 남북으로 연결되는 동호로가 동호대교와 연계되고 지하철 3호선이 지나고 있으며, 남쪽으로는 강변북로와 연결되어 교통이 편리하다. 행정동은 옥수1동과 옥수2동의 2개 동이 있다.
성동구의 북부에 위치한 동이다. 동명은 용두동 지역과 답십리동 지역이 통합되어 이루어졌기 때문에 머리글자인 ‘용’(龍)자와 ‘답’(踏)자를 따서 지었다. 조선시대 한성부 동부(東部) 인창방(仁昌坊) 답십리계(踏十里契)에 속하였고, 1895년 한성부 동서 인창방(성외) 용두리(龍頭里)라 하였다. 1911년 경성부 인창면에 속하다가 1914년 경기도 고양군 숭인면에 속하였으며, 1936년 경성부 답십리정(踏十里町) · 용두정(龍頭町)이 되었다. 1946년 동대문구 답십리동 · 용두동이 되었으며, 1975년 두 지역을 통합하여 용답동이라 하고 성동구에 편입하였다. 위치는 동남쪽으로는 중랑천, 서쪽에 청계천, 북쪽에 동대문구가 접해 있다. 문화시설로는 자동차전용극장이 청계천과 중랑천이 만나는 지점에 있다.
성동구의 중앙에 위치한 동이다. 동명은 이곳에 있는 응봉산에서 유래되었다. 조선시대 한성부 남부 두모방 신촌리계(新村里契)에 속하였다. 1895년 한성부 남서 두모방 신촌리계 신촌리동이라 하고, 1911년 경성부 두모면 신촌리에 속하였다. 1914년 경기도 고양군 한지면 신촌리로 하고 1936년 경성부 응봉정(鷹峰町)이 되었다. 광복 후 1946년 성동구 응봉동이 되었다. 위치는 동쪽에 중랑천, 서쪽에 금호동1가, 북쪽에 행당동, 남쪽에 금호동4가가 접해 있다. 전통제례로는 부군당(府君堂)에서 동제를 올리고 있다.
성동구의 중앙에 위치한 동이다. 동명은 구전에 의하면 행당초등학교 동쪽 산 일대, 즉 아기씨당이 위치한 곳에 예로부터 살구나무와 은행나무가 많이 심어져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조선시대 한성부 남부 두모방(豆毛坊, 城外) 신촌리계(新村里契)에 속하였다. 1895년 한성부 남서(南署) 두모방 신촌리계 행당리동이라 하였고, 1911년에는 경성부 두모면 행당리에 속하였다. 1914년 경기도 고양군 한지면 행당리였고, 1936년에는 경성부 행당정(杏堂町)이 되었다. 광복 후 1946년에 성동구 행당동이 되었다. 위치는 동쪽에 중랑천, 서쪽에 하왕십리동, 북쪽에 도선동 · 마장동 · 사근동, 남쪽에 응봉동이 접해 있다. 문화시설로는 성동문화회관, 성동구립문화정보센터, 성동문화원과 성동구도시관리공단이 관리하는 마장국민체육센터 등과 성동구청, 구의회, 성동경찰서 등의 행정기관도 이곳에 모여 있다. 행정동은 행당1동과 행당2동의 2개 동이 있다.
성동구의 서북부에 위치한 동으로 이 지역의 행정업무는 도선동사무소가 담당하고 있다. 동명은 우리 민족의 시조 단군의 건국이념인 ‘홍익인간(弘益人間)’의 홍익을 따서 제정했다. 조선시대에 한성부 동부 인창방에 속하였고, 1895년 한성부 동서 인창방 왕십리계였으며, 1911년 경성부 인창면에 속하였다. 1914년에는 경기도 고양군 한지면 하왕십리가 되었고, 1936년 경성부 하왕십리정으로 바뀐 뒤 1946년에 성동구 하왕십리동이 되었다. 이후 1963년 일부가 분리되어 홍익동이 되었다. 위치는 동쪽에 마장동, 서북쪽에 하왕십리동, 남쪽에 도선동이 접해 있다.